책은 작가의 관점이다. 요한복음을 읽는 것은 사도 요한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사람은 본 것을 ‘단어’로 표현한다. 단어와 문장이 곧 ‘관점’이다. 요한복음 5장은 ‘그후에’로 시작해서, “모세”로 끝난다. 끝 문장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이다. 5장은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표적이다.
중요 사건은 38년된 병자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다. 갈등은 “안식일”에 있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단어는 모두 의미가 있다. 가령,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요한이 썼다. 우리는 그것을 놓고, “무슨 명절일까?”라고 궁금해할 이유는 없다. 요한이 밝히지 않은 것은 해당 사건에서 큰 의미가 없어서다. 그런데, 명절의 명칭은 감췄는데,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장소를 밝혔다.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하는 못”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양문(羊門)은 제사용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베데스다는 은혜를 뜻하는 헤스다(בית חסד)와 집을 뜻하는 벳(חסדא)의 합성어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다.
단어앞에 “참”을 붙이라!!
요한복음을 읽을 때, 기본법칙이다. 요한복음은 매우 중요한 핵심 키워드를 던져놓고, 그 본질을 묻는다. 가령,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는 “참된 혼인잔치”를 묻고 있고, “참된 신랑”을 묻고 있다. 요한복음 4장도 “참 야곱”과 “참 남편”과 “참 우물”을 묻고 있다. 요한복음 3장은 “참된 성전”으로 예수님이다. 그와 같이, 요한복음 5장은 “참 베데스다”와 “참 안식일”과 “참 모세”를 묻고 있다. 누구든지 ‘은혜의 집’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진정 은혜를 베푸는가? 은혜를 베푸는 자가 ‘참 베데스다’이다. 고통받는 자에게 안식을 주는 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38년된 병자”는 명확히 “38년동안 머문 가데스 바네아 배회 사건”(신2:14)을 암시한다. 구약성경에서 “38”은 가데스 바네아 광야 기간외에 없다. 병자의 이름도 명시하지 않고, 병든 기간을 정확히 표기한 것은 요한의 편집의도가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38년 광야=율법=무덤=정죄=제물=경쟁으로 연결된다. 반대로, 예수님은 병자를 직접 찾아가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의 종교행위에 구속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일어나 걸어가라”
병자가 한 것이 무엇인가? “살려주세요”라는 간절함도 없었다. 단지,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랬으니, 38년이나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인들은 “진리를 사모하는 간절함”으로 종교행위를 반복한다. 이단종교에 속한 자들도 동일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종교행위를 버리고, 일어나 그곳을 떠나, 걸어가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