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한 여인은 깊은 어둠속에 ‘빛’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고대문서에서 이 사건은 전체적으로 대괄호에 놓였다. 없는 사본이 많았다. 얼마나 불편했으면 뺐을까? 부정적 영향력을 걱정한 부모의 심경이리라. 요한복음의 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상당히 불편한 사건’이다. 그만큼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다. 음행한 여인은 드러난 죄인, 고발자 바리새인은 숨겨진 죄인(살인죄)으로 설정된다. 율법은 무엇인가?
음행한 여인을 놓고, 율법과 은혜가 정면을 충돌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새벽에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단횡단의 양심 문제가 아니다. “죄”는 어떻게 용서받는가? 정죄함으로 “죄인”은 죽여도, “죄”는 없앨 수 없다.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죄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죄를 죄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다.
2000년 초반, 김대중 정권 시절 카드 대란이 있었다. 대학생들에게, 실업자에게 신용카드를 무작정 만들어주니, 누구든 신용카드가 4개 정도 있었다. 이 카드에서 저 카드로 ‘카드 돌려막기’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살다가, 현금서비스 한도가 갑자기 축소되면서, 한꺼번에 신용불량자가 된 사건이다. 나도 그때 피해자다.
이 카드에서 저 카드로 돌려막듯, 율법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계속 희생양을 삼는다. 음행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면 정의가 오는가? 국정감사와 특별검사로 대통령을 탄핵소추하면 정의가 오는가? 죽고 죽이는 정치의 율법은 ‘정죄’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이 시대는 왜, 은혜의 정치인 1명을 만날 수 없는가? 정죄할 권한을 가진 자로서, 정죄하지 않고 자신이 오물을 뒤집어 쓰는 그런 은혜의 정치인이 없는가? 요한복음 8장은 “돌”에서 시작해 “돌”로 끝난다. 돌을 들고 음행한 여자를 죽이려고 했던 백성들이 후반부에서 그 돌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세상을 쳐다보면, 꼭 드라마같다. 드라마는 시청률이 30%를 넘어가면 인생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3~4달 동안은 행복의 도가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 이 드라마에서 저 드라마로 그저 교체될 뿐이다.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정권에서 저 정권으로, 이 뉴스에서 저 뉴스로, 이 비리에서 저 비리로 옮겨가는 지그재그 뱀처럼 세상은 ‘거짓의 용’에 휘감겨 있다.
정의는 그곳에 없다. 세상속에서 수많은 범죄를 적발해 죽여도, 그곳엔 정의가 없다. 정의는 음행한 여인에게 행하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다. 익명의 어떤 음녀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딸로 만드신 주님의 사랑이 정의다. 우리의 입술은 과연 바리새인적인가? 주님처럼 침묵의 자비인가? 부화뇌동하는 백성과 같은가? 바리새인들은 계속 떠들었고, 주님은 그 때 땅에 글을 쓰셨다. 어떤 죄를 발견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시끄러운 세상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