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부활사건이다. 7가지 표적에서 마지막 표적이다. 9장과 10장과 11장은 상호 연결됐다.
9장 3절에 맹인에 대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11장 4절에 나사로에 대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중략)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다.
맹인 사건과 나사로 사건은 “십자가”를 “빛”으로 증거하는 표적이다. 맹인이 눈을 뜨자, 눈뜬 바리새인들은 눈이 감겼다. 요한복음의 작가는 그것을 오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눈뜬 자는 감기고, 감긴 자는 눈을 뜬다. 빛이 어둠에 비추면, 어둠은 어둠에 갇히고, 빛은 빛으로 존재한다. 이때, “빛이 비추므로”가 핵심이다. 맹인이 눈을 떴고, 영적인 눈까지 떴다. 영적인 눈은 주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른 것이다. 그때, 빛과 어둠이 나뉘었다. 그것이 “출교”의 출애굽 사건이다.
요한복음이 출간될 당시, 로마제국과 이스라엘은 북한과 미국처럼 사이가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과 대적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헤롯성전이 붕괴된 AD70년 이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을 강제 추방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추방하듯, 유대인들도 유대땅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눈에 보이는 “출교”가 내면적으로 “자유와 해방”임을 믿어야한다. 맹인 사건에서 눈을 뜬 자는 맹인 1명이다. 그 1명에 의해, 빛과 어둠이 갈렸다. 빛의 사람인가? 어둠의 사람인가? 주님을 진실로 믿는 자마다 “빛의 아들”이다.
나사로 부활 사건도 동일하다. 제자들조차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다. 글로 남겨진 기록들은 “형체”가 “뼈와 살”처럼 분명하다. 글이 아닌 마음은 믿음과 의심과 불신을 계속 반복한다. 보이면 믿고, 안 보이면 믿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심리상태다. 특히 십자가 사건이 그렇다. 저주의 십자가에 메달려 죽임을 당했는데, 그것이 “부활의 표적”이라고 하니, 의심하는 성도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보여주는 증거의 표적으로 “나사로 부활사건”이 있었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는가? 죽음을 생명으로 보는가?
138억년이다. 우주의 나이로, 하나님은 138억년을 기다려, 이 땅에 직접 육체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땅의 창조주다.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처럼 말을 하니,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처럼 사람들이 이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창조주가 이 땅에 내려오신 목적은 “죄문제”와 “영생”이다.
이 땅은 하늘에서 쳐다보면 “동굴”이다. 어둠에 익숙하면 희미한 빛으로도 살아간다. 영화관의 어둠도 나름대로 밝다. 그러나, 어둠속이다. 빛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생이며, 진리다. 138억년 동안 창조를 해오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자신의 입술속에 주님의 말씀을 놓자.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살이에 빠져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신다.
“창훈아!! 나오라!!”
(요11:44)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계시록 18:4)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