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고서, 우리는 빛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등불을 무시할 때가 많다. 그러나, 등불이 없다면 빛도 깨달을 수가 없다. 등불의 단점은 ‘등불’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철학을 위한 철학, 종교를 위한 종교를 하는 것이 문제일 뿐, 등불이 빛을 증거한다면, 최고의 가치를 발현한다. 빛을 깨달으면, 등불은 그때부터 무익하다. 그러나, 등불은 빛을 깨닫게 하는 출입구임을 반드시 깨달아야한다. 빛을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등불’이 필요하다. 그래서 빛을 깨달은 자들은 손에 등불을 들어야한다. 그것이 복음전파다. 믿는 성도는 세상앞에 등대와 같다. 세상은 밤이요, 우리는 그들에게 빛을 비춰야한다. 그 빛은 ‘등불’이다. 우리가 침묵하면, 세상은 여전히 어둠이다. 믿는 성도가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다면, 세상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공관복음의 중심제자는 ‘베드로’이며, 요한복음도 ‘베드로’가 중심이다.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등불로 이 땅에 사명을 받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 그때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주님을 따랐다. 세상은 어둠이며, 밤이며, 맹인이다. 종교의 등불로서 세례요한이, 지식의 등불로서 동박박사가, 주님을 깨닫고 그것을 증거함으로 사람들은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 증거의 등불은 세상앞에 ‘빛’의 역할을 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사역이 바빠서, 입장과 처지가 난처해서, 입을 닫고, 기록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활동은 소설이 됐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주님을 의심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의심이 등불의 무익함이 아니다. 등불이니까, 형광등이 깜빡깜빡하듯 할 수 있다. 빛앞에서는 등불은 어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앞에서는 등불이 ‘빛’이다. 인생은 세상속에서 지식과 명예와 권력과 능력과 예술과 철학과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한 생활영역에서 각자의 개성의 등불에 ‘성령의 기름’을 담아서, 증거의 불을 밝혀야한다. 열처녀는 모두 등불을 가졌으나,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지혜로웠다. 기름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이다. 등불은 누구나 있다. 세상을 향해 주님을 증거하는 등불이 되어야한다. 그가 오실 때,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 주님은 그것을 분명 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길 소망하며, 주님이 오직 구원주임을 지면에 남긴다. 이 글이 반딧불처럼 미약하여도, 깊은 어둠에 갇힌 누군가에게는 ‘빛으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