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장창훈”을 부르면,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이름은 곧 명령이며, 호출이다.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내 책상엔 주보가 올려져 있다. 1년 동안 모은 주보는 대략 5cm 남짓 된다. 새로운 주일이 되면, 주보는 맨 위에 놓인다. 일주일 내내 나는 그 주보를 ‘뉴스보듯’ 들여다본다. 주보는 교회 소식지요, 주간지다.
기도를 할 때는 주보를 펼치고, 성도의 이름을 불러본다. 눈을 살짝 뜨고서 교회 소식을 다시 둘러보며, 식사 준비팀과 예배 준비팀과 교회 운영팀들의 이름도 자세히 살펴본다. 이름들로 구성된 교회 주보는 내게 깊은 영감을 준다. 처음엔, 주보가 주보였다. 3단으로 접힌 그 주보가 ‘살아있는 뉴스’로 다가온 것은 성도들의 이름이 마음에 스미면서다. 이번주 주보에는 내 이름이 실렸다. 설거지 당번이다. 2명씩 짝궁으로 설거지를 하는데, 설거지 동역자가 어찌 반갑던지요. 예배를 마치고, 계단을 함께 내려왔다. 설거지는 일주일 연기됐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갔다. 조국 장관의 사퇴소식, 연예인 설리의 자살소식이 네이버 실검을 차지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소식들에 어찌 무감각하리요. 이념과 종교를 떠나서, 국가의 공인들에게 가슴 아픈 일들이 생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사회가 좀 더 겸허해지길, 마음이 착잡해졌다. 혼돈의 시대다. 단테의 첫문장처럼, 나는 어디에 있는가? 빛이 없다면, 넘어갈 수 없는 장애물(障碍物)에 봉착한다. 빛이 오면, 장애의 안개도 사라진다. 작은 방, 작은 마음을 모아, 내 교회와 내 조국과 내 인생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톱니바퀴처럼, 나는 요한복음 14장과 창세기 44장(30+14)을 읽었다. 창세기 44장에서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복동생 베냐민을 대신해서 ‘포로’가 되기로 작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건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은 격랑(激浪)한다. 유다는 어떤 심경으로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잡히면서,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살리려고 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두 아들을 잃고, 그 사건으로 20년전 ‘요셉’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홀로 흘렸을 것이다.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마음에 품고, 대신 자복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인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