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16일, 요한복음 16장을 읽었다. 16장의 끝문장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사람은 살면서, 실수와 실패와 불법을 겪는다. 완벽과 성공과 합법을 꿈꾸지만, 마음의 방향과 다르게, 인생은 자주 넘어지고, 죄의 먼지가 묻고, 실패의 터널을 지나는 ‘장애’(障碍)에 부딪힌다. 장애(障碍)는 막힐 장(障) 거리낄 애(碍)이다. 장애물 경기처럼, 넘어야할 장애물에 도리어 넘어진다.
주님도 그러하셨다. 세상이 보기에 주님은 실수가 잦았다.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아,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았다.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놓고 집주인이 힐문하자, 주님은 바리새파 전체에게 ‘저주의 악담’을 퍼붓고, 그 집을 떠나기도 했다. 세상이 보기에 주님의 행하심은 장애물이었다. 십자가의 장애물은 곧 실패다. 세상적으로 실패했으나, 주님은 그것을 “성공과 승리”로 예언하신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으며, 그 십자가의 궁극적 목적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적으로 매장당해 묻힌 ‘맹인’을 통해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눈뜸”의 표적을 행하셨다. 실로암 맹인 표적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3명의 증인중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예수님을 면전에서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그 사건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진실한 증거’가 되었다.
‘실수와 실패와 불법’은 십자가를 통해 은혜로 변화된다. 성경은 사람을 불편케 하고, “정답”을 결정적으로 숨겨버린다. 주님께는 “알지 못함”이 답일 때도 있다.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이 ‘답’이 되신다. 주님이 세상을 이겼고, 우리는 그런 세상속에 속해서, 주님의 승리로 ‘복음’은 승전보요, 우리는 전쟁의 전리품(戰利品)으로 포로였으나, 주께서 오히려 자유를 주셨다.
2천년 동안 이단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자주 출현했다. 요한복음의 성령론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정경속에 들어오는데, 성령론은 상당히 불편한 요소다. 마치,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예언하듯,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을 예언하셨다. 그래서, 그 성경구절을 타고서 이단들이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성령이다”고 주장한다. 한국에도 그런 이단이 많다. 요한복음 16:7에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진리의 성령은 말씀한다. 그래서 성령의 이름으로 온 많은 이단들이 “자신을 믿지 않은 것”을 놓고, “죄와 의와 심판”을 말한다.
그러나, 16:14에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했고, 16:16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셨고, 15:18에서도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곧 예수님 안에 있게 하는 ‘거룩한 영’이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한 영’이다. 예수님과 성령이 같은 존재임을 믿어야한다. 그래야 이단의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