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26에서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라고 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땅 총리가 되었다는 뉴스는 “충격”이었다. 요셉은 야곱에게 부활한 것이다. 21년동안 야곱에게 요셉은 “죽은 자식”이었다.
대성통곡하고, 피묻은 옷을 시체삼아, 장례식을 치르고, 빈 관을 묻은 무덤도 있었을 것이며, 시체들을 찾아야한다고 자식들을 보냈거나, 야곱이 스스로 도단땅까지 갔을 수도 있다. 10명의 자녀들이 “똘똘” 뭉쳐서, 아버지를 속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 거짓말이 결국 탄로났다. 아버지는 속여도, 요셉은 속일 수가 없다. 우리는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은 속일 수가 없다.
모든 이단의 교주들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양심”앞에 자복해야한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돌려보내면서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요셉이 그들을 용서했으나, 그들은 반드시 아버지 야곱을 속인 죄를 스스로 자복해야한다. 45장 26절에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到) 알리어 이르되(言)”가 바로 그것이다. “요셉을 팔았다”는 것을 숨겼으나, 결국 그들은 21년전 그 사건을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했으며, “요셉이 살았다”고 증거해야했다. 이 사건은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된다. 요셉이 살아있듯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생매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을 생매장하면, 생매장당한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4~5)
요셉과 11형제들이 눈물로 상봉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부활절에 살아나서 제자들과 만난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그때 도마는 없었다. 형제들이 도마를 설득해서, 일주일 후에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그처럼, 야곱은 ‘자식들의 양심고백’을 통해서, 요셉과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은 사람이 끊을 수가 없다. 율법이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창세기 기자는 “수레”를 매우 강조한다. 흉년에 굶주린 야곱과 그 가족들에게 “수레”는 노아의 방주와 같고, 고센땅은 홍수가 끝난 후 아라랏산이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창 46:30)
인생은 하나님을 살아서 만나야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얼굴이며, 그 인격이며, 이름이다. 영혼의 양식이 없어 방황하는 영적 기갈의 시대에, 세상 지식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지식의 홍수는 ‘말씀의 방주’를 침범하지 못한다. 성령은 때로 어리둥절로 감동을 주신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어리둥절’로 인정하는 바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