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피흘림과 목마름으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영혼이 떠나시기 전, 마지막 2문장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목마르다 (요19:28)
2. 다 이루었다 (요19:30)
운명하시고,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이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 생명의 피와 성령의 물이 이 땅에 상속됨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시인했다.
“십자가”는 2천년동안 인류를 둘로 갈랐다. 십자가를 구원의 증표로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다. 모세가 갈라진 홍해를 걸어가듯, 십자가의 구원은 둘로 갈라진 인류의 문명사를 지금까지 걸어왔다. 믿는 자는 홍해를 건너듯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권력과 향락과 세속’의 이집트에 남겨질 뿐이다. 주님은 죽음을 향해 생명을 던졌고, 그 죽음을 뚫고 부활하셨다. 주님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2명의 인물이 새롭게 나타난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이다. 요즘 국회의원은 소속 당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신의 신념을 양심의 옷장에 숨기고 살아간다. 옷은 옷장에서 꺼내 입어야하는데, 세속의 옷만 입고 살기에 급급하다. 신앙적 소신을 말하면, 벌떼처럼 달려드는 비난이 무서워서 그렇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러했다. 주님의 죽음앞에서는 그들도 세속의 옷을 벗고, 주님을 증거하는 옷을 입었다. 예수님을 믿는 정체성의 옷이 들킬지라도, 그들은 출교의 사회적 죽음앞에 “예수님의 장례”를 집도했다. 이것은 계시록 18장과 19장 사건과 맥이 이어진다.
순교자의 피, 예수님의 피흘림, ‘피옷을 입은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벨론의 권력에 속한 몇몇 땅의 왕들과 몇몇 상인들과 몇몇 선장과 선원들을 구출하였다. 그 몇몇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백부장’이 포함된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죽었을 때, 돌을 던진 자들이 옷을 ‘사울’앞에 맡겼다. 그것은 그 사건을 계획한 자가 ‘사울’이라는 암시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바벨론의 세속에서 꺼냄을 받은 인물이 바로 ‘사울’이다. 사형집행관 백부장처럼 사울이 그러했다.
인생, 살면 얼마나 살까? 길면 100년, 짧으면 70년, 혹은 더욱 앞당겨진다. 인생, 겨우 100m 달리기에 불과하다. 혹은 100km 무장행군에 불과하다. 곧, 종착역이다. 그 동안에 주님이 맡긴 달란트의 바톤을 들고, 뛰어야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명령, 생명(生命)의 존재 이유다. 타는 목마름으로, 넘치는 피흘림으로, 복음으로 살고, 복음으로 죽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은 10월 19일, 요한복음 19장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