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이다. 7장의 결말은 ‘충격’이다.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신자라면 모를까, 믿는 성도는 7장 23절 말씀을 기억해야한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3)
왜,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했을까? 주님이 이름을 모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것이다. 생명책은 곧 주님의 기억이며, 주님의 출석부다. 담임교사는 출석부로 학생의 이름을 부르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불러서, 인도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주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외면한 자들은 주님을 “주”로 따른 자들이다. 믿는 성도요, 목사요, 선지자요,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2)
결국,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을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주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고 말씀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지자 노릇, 귀신 축출, 권능의 행함은 ‘행함’이 아닌가?
“앎”은 지식이 아니고, 사귐과 인격이다. “안다”고 할 때는 경험과 교제와 삶의 사연으로 깊은 것까지 아는 것이다. 인격적 교감이 없다면,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나를 모른다. 이와 같이, 종교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설교의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활동과 구원은 별개다. 구원은 주님과 사귐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말씀하게 해야한다.
주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내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게 해야한다.
주의 이름을 많은 권능을 행하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권능을 행하게 해야한다.
나와 주님의 사귐이 있다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안에 머물게 되므로,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 삶과 신앙이 따로 놀면 안된다. 이단들은 점점점 교세가 확장되니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발가락의 떼처럼 생각하다가, 결국 십자가의 은혜도 망각하고, 세속의 권력과 향락에 술취해 버린다. 이들은 반석위에 집을 짓지 못해서, 결국 무너진다.
어떤 큰 일을 생각하지 말고, 주일예배에 집중하고, 날마다 복음을 읽으면서 말씀을 통해 주님과 사귀면서, 인격을 입고 나타나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날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주님이 부르는데, 우리가 그 소리를 외면하면, 주님도 결정적일 때 외면할 수 있다. 주님의 소리는 날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예배함으로 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