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에서 “시대성의 옷”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은 말이 없다. “성경이 말을 한다” “말씀이 말씀한다” “성경이 말씀하길”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만, 성경은 말이 없다. 성경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텍스트는 무생물이다. 생각의 주체는 독자요, 작가다. 그래서 독자는 성경말씀을 묵상할 때, 자신의 생각에서 작가의 생각으로 이동해야한다. 최초, 그 글을 썼을 때 작가의 관점이 무엇인가? 이것이 성경읽기의 성육신 과정이다.
현대소설을 읽듯이 본문을 본문으로만 해석하면 절대로 안된다. 역사소설과 역사 드라마는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보여주므로, 독자와 시청자는 생각없이 이해해도 이해가 된다. 반면, 성경은 그렇지 않다. 그 시대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한다. 성경은 구원의 선물을 주므로, 생명수 강물이 성경의 문장속으로 흘러가므로, 성경해석은 “생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잘못된 성경해석은 “가짜 감동”만 줄 것이다. 우상을 믿어도 구원의 느낌이 온다. 그것은 기분만 좋을 뿐, 구원이 없다.
내가 내 멋대로, 탁월한 지혜를 동원해서 성경본문을 새롭게 해석하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다. ‘작가의 범주’를 넘어선 해석은 금물이다. 절대원칙이다. 계시록은 그것을 놓고, “해석의 월권”을 금지했다. 그 시대에 계시록을 놓고, 성경해석이 난무했을 것이다. 계시록 작가는 “본 뜻”을 유지하도록 천명한다.
[계시록 22장]
18.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시록 말씀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더함과 덜함’이 없도록 강력히 말씀한 것도 있고, 성경해석을 함에 있어서 ‘극히 조심’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해석안함”을 스스로 말해도, 그것이 이미 성경해석의 과정이다. 읽는 것이 ‘성경해석’에 속한다. 그래서 진리와 성령으로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한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와 까마귀 사건이 나온다. 그 사건을 놓고, “까마귀는 까마귀다”라고 풀이하는 성경학자들이 있고, “까마귀는 사람이다, 우상숭배자다”라고 풀이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다. 성경적 시대 맥락을 따라 해석하면, 까마귀는 엘리야를 따른 이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까마귀의 정체성”이 문제다. 우리가 우리의 인식으로 “까마귀”를 생각하면, “까마귀”의 본질을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서, ‘엘리야의 관점’으로 들어가야한다.
아합왕과 우상숭배자는 “까마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고, 성경을 풀면, 까마귀는 계속 “아합왕과 우상숭배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을 받고 엘리야 선지자의 식사를 제공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들이 ‘떡과 고기’로 엘리야를 대접했다. ‘떡과 고기’는 제사음식이라는 우리의 미신적 인식을 벗자!! 성경속으로 들어가야한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었고, 그곳에서 까마귀들의 공궤를 받았다. 까마귀들은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3~4)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 17:9)
그릿 시냇가에 숨은 사건, 사르밧으로 이동한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으로 엘리야가 행한 것이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떡을 주었듯이, 까마귀들도 엘리야에게 직접 떡과 고기를 가져간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의 제사상을 엘리야가 훔쳐 먹은 것이 아니다. 바알 제사는 그릿 시냇가에서 드리지 않는다. 바알 제사는 사마리아 수도에서 드릴 뿐이다. 게다가 바알 제사는 아침 제사만 드린다. 그들의 제사는 떡과 고기와 각종 과일들로 넘쳐날 것이다. 하나님의 제사는 아침과 저녁 2번 드린다. 민수기 28장에 나와있다. 특히, 고기와 떡은 하나님의 제사에서 핵심이다.
[민수기 28:3~4]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 살면서, 오병이어처럼 생활을 유지하는 ‘떡과 고기’로 연명했을 것이다. 어린양을 대신해서 ‘작은 고기’로, 풍성한 떡을 대신해서 ‘작은 떡’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을 것이다. 작은 밥과 반찬을 가지고도 엘리야는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드렸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믿었듯이, 까마귀들도 엘리야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신도가 된 것이다. 까마귀들은 부정한 동물로서 ‘이방인’을 상징한다.
정결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외면했고, 엘리야의 선교활동으로 까마귀처럼 부정한 이방인들과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해석을 할 때는 하나님의 관점, 엘리야의 관점, 유대교의 종교문화적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해야, 성령의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고, ‘구원의 선로’에서 탈선하지 않는다. 엘리야를 먹인 까마귀들의 ‘떡과 고기’는 ‘오병이어 표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예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