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단어와 단어를, 문장과 문장을 ‘살과 뼈’로 묶어서 생명력을 창조한다. 인터넷의 블로그를 드래그하는 가짜 작가를 제외하면, 모든 작가는 글의 예술가다. 특히 복음서 작가들은 성령의 감동과 경험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의 비판을 각오하고 ‘작품’을 완성했다. 엄한 교수밑에서 훈련받은 제자는 그 미래가 밝다. 복음서 기자들은 엄한 유대교 교수밑에서 핍박받으면서 ‘신학논문’을 제출한 것과 같다.
성경 66권은 작가들의 심혈(心血)이며, 성령의 특허권이 있고, 하나님께서 낳은 생명체와 같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유언장이며,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하늘의 진리다. 성경적 진리를 새롭게 깨달았다고 해서, 그 성경이 해석한 자의 것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성도들의 상속권이 공증된 계약문서다.
유언장은 유언을 남긴 사람의 뜻을 따라 해석해야한다. 자녀들이 자기 마음대로 임의로 해석하면 유언장은 효력이 상실된다. 유언장은 반드시 유언을 남긴 자의 뜻이 핵심이다. 성경도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작가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 땅에 남겨놓은 약속의 유언장이다. 그 유언장을 잘못 해석하면, 하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이 땅은 유언장을 잘못 해석하면, 법원의 다툼을 받아 싸우겠지만, 성경은 거짓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거짓이 상속권을 갖지 못한다. 성경해석은 오직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야한다. 하나님의 관점을 벗어나서, 임의로 소설쓰듯이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훔친 강도요, 절도범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작가의 의미’를 넘어설 수 없다. 성경해석의 제1 원칙이다.
창세기 2장에 선악지식의 나무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 2:17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3:6에서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
어떤 종교단체는 해당 사건을 ▲선악과 ▲따먹다 ▲벗다의 이미지를 하나로 연결해서 ‘금단의 열매’로 해석한다. 즉, 남녀의 성관계로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해석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해석법은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해석”에 불과하다. 그 해석을 덮썩 먹으면, 다른 모든 성경해석을 먹지 못하고, ‘구원의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다.
그것만 옳고, 나머지는 옳지 않은 대표적인 뱀의 해석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이성관계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의 사건이다. 특히, 여자가 남편에게 준 ‘그 열매’가 어찌 성관계가 될 수 있는가. 부부관계는 이미 육체결합을 전제한 표현임을 알아야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이성관계”로 해석한 자들은 “성경을 풀었다”고 하면서, 성경의 주권을 주장한다. 곧, 자신이 “아담의 후예”라는 것이다. 속지 말자!!
“따먹는 것”과 “벗은 것”과 “임신사실”과 “금단의 열매”와 “동산중앙”은 모두 “그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면, 계속 그렇게 보여진다. 뱀독에 중독된 것이다. 담배 중독자는 계속 담배만 찾고, 술 중독자는 계속 술만 찾는다. 담배중독자가 담배를 끊으면, 금단현상으로 모든 물체가 ‘담배’로 보인다. 유물론에 심취되면, 모든 사건이 유물론으로 보인다. 그처럼, 선악과를 이성관계로 풀면, 세상만사가 모두 ‘남녀관계’로 해석된다. 창세기 1:28에 이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는데, 남편과 성관계가 범죄라는 것인가? 부부는 같은 방에서 동침한다. 동침하지 않은 것이 부부에게 오히려 죄가 된다.
2:24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부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왜 선악과를 이성관계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을 계속 옳다고 고집할까?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을 무시해서 그렇다. 그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성경위에’ ‘자기해석’을 놓는 오류를 범한다. 성경보다 ‘영감에 의존하는 자기 해석’이 위에 있고, 성경은 참고서로 전락한다. 이단의 교리는 대부분 그렇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에 ‘끝’을 바꾸듯, 성경본문에다 ‘자기생각’을 덧붙이는 성경해석은 ‘뱀의 방법’이다. 성경해석은 반드시 ‘성경본문’에 머물러야한다.
하와는 뱀의 성경해석을 듣기 전부터 말씀의 끝을 약간 다르게 해석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했던 말씀과 하와가 뱀에게 했던 말은 약간 다르다. 하와는 아담이 전해준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로 바뀌더니, 뱀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하와가 말한 “죽을까”의 의문문에는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본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성경말씀은 유언장과 같다. 유언장을 해석할 때는 유언장과 유언자의 언어를 면밀히 검토해서, 그 뜻을 명확히 드러낸다. 뜻이 불분명하면, 유언장은 효력이 없다. 유언장은 그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성경본문은 유언장처럼 해석해야한다. 이성관계가 아닌 결정적 단서들이 무수하게 많은데도, “선악과=금단의 열매”라고 풀이한다고 해서, 성경의 유언장이 재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선악과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신약의 에덴동산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의 길로 갔다. 십자가의 죽음앞에서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보여준 ‘창세기 2장과 3장의 정답’이다. ‘십자가의 행위’로서 창세기 2장과 3장을 해석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뤘다.
결국, 성경의 유언장이 상속자로 예수님을 지목하니, 이단들은 “선악과와 십자가”를 다르게 해석하면서, 상속자를 변경하려고 한다. 유언장을 임의로 변경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성경본문을 거짓으로 해석하는 그들이 구원만 박탈될 뿐이다. 뱀처럼!! 아담과 하와처럼!!
** 성경해석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성경본문에서 뜻을 뽑아내는 것, 다른 하나는 성경속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전통적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본문에서 뜻을 뽑아내는 것이다. 뱀의 성경해석은 지혜롭게 보이는 자기 생각을 성경본문에 추가해서, 원본과 다르게 해석한다. 대다수 이단의 교리가 이와 같으니, 조심해야한다. 뱀독은 한번 물리면, 영혼이 치명상이다. 십자가 외에는 해독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