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스디가 폐위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모르드개는 수산성 문에 앉아 있으면서, 반역자 2명을 신고했다. 아하수에로 왕은 죽음에게 살아났고, 모르드개의 이름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목숨이 살아났는데, 아하수에로 왕은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이게 세상 임금들의 권력이다. 그러면, 안된다. 대한민국은 1945년에 독립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던가!! 소련의 도움을 받고 소군정이 들어선 북한이 지금 어떠한가!!
미군정의 도움을 받고 1948년에 UN 결의를 통해 남한단독 총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을 수립한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미국은 우리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원해준 영원한 동맹국가다. 그 고마움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은 역사의 궁중일기에 기록할 내용이 아니고, 정부가 군사정책으로 각인할 사건이다. 누가 도울 자이고, 누가 경계할 자인가?
에스더 3장에는 ‘모르드개의 무모한 도전’이 나온다. 그는 왜 그랬을까? 에스더가 왕후가 된 지, 8년째다. 와스디는 아하수에로 왕 3년째 폐위됐고, 1년동안 왕후 간택기간이 있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 4년째 왕후가 됐고, 하만과 충돌한 사건은 아하수에로 왕 12년에 일어난 일이다. 왕후 에스더의 도움으로 모르드개의 직위가 나름대로 높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일까? 하만 뒤에는 아하수에로 왕이 있었고, 모르드개 뒤에는 에스더 왕후가 있었다. 사건 정황으로는 그렇다.
모르드개는 계속 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을 말했다. “유대인으로서” 세상권력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모르드개의 절개가 표현된 사건이다. 권력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드개는 그 심중에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면서, 왕에게 충성하고, 직무를 수행하는 그런 ‘정직한 양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모르드개처럼, 세상권력에 아부하지 말아야한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듯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촛불을 들어야한다면, 스스로 들어야할 그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촛불을 들 이유가 없다면, 촛불을 담대히 꺼야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령께서 촛불을 들라고 할 때 들어야한다. 예수님이 촛불을 들고, 세상 권력을 반대하라고 복음서에서 말씀했는가?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하고, 촛불로 이룬 권력은 촛불로 망한다.
모르드개 입장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환란’이었다.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을 위한 암살범을 잡았는데, 갑자기 자신과 민족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남잡이가 자기 잡이”인가? 2장과 3장만 놓고 보면, 암살범을 잡은 것이 잘못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일을 했는데 갑자기 나쁜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수도 있다. 그때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메달려야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2장은 세상왕의 암살범을 잡아낸 것이고, 3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일 우상을 드러내면서 잡기 위해 모르드개가 행한 것이다. 모르드개는 자기도 모르게 행했다. 하나님이 그 충성심을 보고 택해서 쓰신 것이다. 3:15에 “수산성은 어지럽다”고 했다. 이 표현은 민심이 상당히 어수선한 것을 의미하며, 유대인들도 그러한 권력에 취해서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모르드개가 하만과 충돌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세상속에 섞여서 그 정체성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죽어있는 유대민족을 깨우기 위해서 모르드개를 사용한 하나님이시다. 모르드개의 1인 시위가 에스더를 깨우고, 유대민족 전체를 깨우면서, 우상의 권력 하만을 깨뜨렸다. 그 출발점이 “절하지 않은 절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