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교 장례문화를 통한 증거목록 (세마포와 수건)
최근, 개구리 소년 사건을 재수사하겠다고 경찰청장이 약속했다. 그 약속 때문에 증거물에 대한 관리가 도마에 올랐다. 대부분 증거물이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증거물이 훼손되면,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증거는 사건의 진실을 입증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결정적 단서가 사건의 실체를 증거한다.
복음서는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책이다. 특히, ‘십자가 사건과 무덤속 부활’을 알려주는 책이다. 성령잉태설은 마리아의 증언외에는 없다. 예수님도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들음으로 믿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예수님은 ‘구원의 창조주’였다. 십자가 사건과 무덤속 부활을 통해서 ‘성령잉태’는 사실로 확증된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십자가 사건과 무덤속 부활 사건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4개의 복음서를 남겨놓은 이유가 있다. 목격자들이 죽어가고, 성도들은 급증하고, 지식으로 무장한 이방인 신도들이 ‘도마처럼’ 질문의 창을 던진 것이다. 그들에게 증거의 방패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이 무덤속 부활에서 맨 먼저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했다는 소문은 유대사회에 널리 퍼졌다. 그러한 유언비어를 상대해서 복음서가 기록된 것도 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목격자들의 증언을 사실로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증거는 모두 훼손된 것이다. 2천년 동안 목격자들의 증언은 ‘증거력’을 확보했으니, 의심과 불신으로 증거능력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증거로 채택된 내용을 토대로 그 당시 정황을 파악해야한다. 그 시대로 우리가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목격자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 목격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고, 목격자들은 그 현장에 있었으니,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무덤속 부활을 봐야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첫 번째 원칙이다. 본문에 충실할 것!!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①죽음 ②장례 ③부활로 나뉜다. 그 시대에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다. “창에 찔림”은 “죽음”을 증거한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3가지는 각 단계별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세밀하게 검증하고 있다. 그 중에서 장레식 후에 텅빈 무덤이 발견된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1990년 연말에 대학시험을 쳤는데, 전기에 떨어졌다. 아!! 그 실패의 충격은 나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나는 방에 쳐박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네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대학에 떨어진 것이 인생의 추락이었다. 대학이 그러한데, 혁명에 실패한 제자 공동체랴!! 선거에 낙선하면, 후보자는 조용히 집에 들어간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제자 공동체는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고, 3일 후, 갑자기 살아났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사건이다. 세상이 보기에 시험에 낙방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기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예수님은 죽었고, 살아났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죽은 그 육체가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구원의 합격자들로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외친 것이다.
무덤은 비어 있었다. 최초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너무 놀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제서야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다. 둘이 확인하니, 무덤은 비어 있었다. 최소한 3명의 증인이 ‘빈 무덤’을 증거한다. 그 무덤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예수님을 기념하는 어떤 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돌무덤으로 꾸몄다. 그곳에는 텅 빈 무덤과 돌이 있었다. 그곳에 중요한 증거물이 빠져 있었다. 세마포와 돌돌 싼 천이 있었는데, 그 기념관에는 그것이 없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기록하면서, 나사로의 부활사건과 연결해서 목격담을 진술한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요20:6)
“큰 소리로 나사라요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요11:44)
베드로가 봤던 증거물은 세마포와 수건이다. 세마포와 수건은 각각 놓여 있었고, 수건은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 이것만 보면, 마치 일반 수건과 세마포 잠옷을 생각하기 쉽다. 전혀 아니다. 우리의 인식으로 무덤속 상황을 상상하면 안된다. 유대장례 문화로 생각해야한다. 니고데모가 유대장례법에 따라서 향품과 함께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체를 염습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세마포 천(넓은 붕대처럼 긴 천들)으로 시체를 나선형으로 감싼다. 붕대로 감쌀 때, 몰약을 묻히고, 감싼 붕대속으로 향품을 넣는다. 시체의 역한 냄새를 없애기 위함이다. 긴 붕대를 감싸는 것은 목부터 다리까지다. 그래서, 나사로가 걸어서 나왔을 때는 발과 몸과 목까지 붕대가 둘둘 감겨져 있었다.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했다. 머리 부분은 터번형태의 둥근 수건을 감싼다. 수건으로 얼굴을 덮는 것이 아니다. 만약, 수건으로 얼굴을 덮는다면,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수건은 떨어졌을 것이다. 나사로는 돌돌 감긴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그대로 걸어서 나왔다. 그처럼, 예수님은 몰약이 발라진 세마포천들과 터번형태의 수건이 있는 그대로 놓인 채, 몸만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죽은 그 시체가 살아난 것을 믿었다. 시체를 훔쳐서, 어딘가에 예수님을 묻었다면, 제자 공동체는 그 무덤을 숭배했을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다툴 가치’가 전혀 없다. 제자들은 훔치지 않았고, 유대교 지도자들도 훔치지 않았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훔쳤다면, 제일 먼저 예수님의 시체를 꺼내놨을 것이다. 예수님은 죽었던 그 육체로서 부활해서, 지금까지 살아계신다. 부활의 육체는 새로운 육체로서 영체다. 우리는 죽으면, 육체를 두고 영혼이 빠져나간다. 예수님은 감쌌던 세마포천들과 수건들을 그대로 두고, 창조주로서 살아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초의 창조주요, 구원의 창시자요, 종말의 심판주로서 제자 공동체는 믿었고, 부활의 증인들이 상속한 믿음의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님은 향품 가득한 세마포와 수건을 있는 그대로 두고, 부유한 무덤을 그대로 남겨두고, 죽었던 몸을 일으켜 살아나셨다. 나사로는 세마포에 돌돌돌 싸여서, 수건에 가려서 살아났지만, 주님은 그런 것들을 그대로 빠져나왔다. 우리도 주님을 믿음으로 세상적인 것들을 벗어나서 살아야한다. 주님은 부활의 몸으로 변형되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의 옷을 입고, 성령의 숨결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신다. 주님을 믿음으로 살아있는 몸이 신령함으로 태어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