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추출의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누가복음 4장에서 고향 나사렛 교회 부흥집회 설교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할 때는 수정, 편집, 삭제, 붙임의 4가지 방법을 활용했고, 이사야의 원문의 뜻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롭게 변형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문자적 틀에 갇히지 않으셨다. 창세기 2장 24절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성경말씀도 그 상황에 맞춰서 단어를 바꿔서 적용하셨다. 주님은 “남자” 대신에 “사람”으로 바꿨다.
성경원문에서 그 뜻을 추출해서, 원문과 DNA가 같은지, 유전자 검증을 하듯 상호 비교해서, 뿌리가 원문에 있게 해야, 추출의 기법이 유효하다. 추출된 성경해석이 만약 원문과 정반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이다. 원문은 근본적으로 ‘2개의 정반대 뜻’을 의미할 수 없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 “선악과 금지”를 말씀했는데, 뱀은 그 말씀에 덧붙여 설명하면서 “선악과 허락”으로 변경했다. 뱀의 해석은 성경원문을 정반대로 왜곡한다. 설령, 그것이 지혜롭게 보이는 설명같아도, 성경원문의 뜻이 정반대로 보여지게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율법조항을 설명하면서, “살인치 말라”는 원문조항에서 “분노와 욕설과 저주”의 의미를 추출했다. 모세가 기록한 ‘살인’속에는 ‘분노와 욕설과 저주’도 포함된 것이다. “간음치 말라”는 의미속에서 “음욕”을 추출했다. 주님은 성경해석을 하면서, 원문의 뜻을 더욱 현실에 맞게 강조하고, 그것을 확정했다.
그런데, 어떤 종교단체는 성경구절을 서로 짜깁기해서, 2개를 오려 붙여, 엉뚱한 뜻을 창출한다. 성경의 사건들을 서로 비교해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듯이 새롭게 뜻을 창조하는 성경해석은 필요하다. 이때, 새로운 성경해석이 과연 성경적인지, 양쪽의 성경해석과 맥이 같은지, 비교분석해야한다. 2개의 사건이 서로 만나, 새로운 의미의 아들이 탄생했으니, 새로운 의미는 그 DNA가 본래 2개의 사건과 같아야 한다. 2개가 만나서 만들어진 뜻이 본래 뜻과 전혀 다르다면, 그 성경해석은 버려야한다.
요한복음 1:21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다. 그때 세례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고 했다.
해당성경구절에 비슷한 구절이 마태복음 11:14과 17:11에 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4)
[마17:11~13]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을 서로 섞어서, 세례요한의 증거와 예수님의 답변이 서로 어긋났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렇게 해석하는 종교단체가 많고, 급진적 종교단체의 성경공부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사명”에서 교육하고 있다. 면밀히 검토하면,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전에, 자신의 사명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세례요한이 죽었을 때, 2번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세례요한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말이 어긋났을까?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한다. 세례요한이 답변한 것, 예수님이 설명한 것,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질문에서 차이가 난다. 먼저, 유대인들은 대놓고 세례요한에게 “갈멜산 전투를 일으킨 그 엘리야냐”라고 물었다. 영혼의 환생을 물은 것이다. 세례요한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사야서 45장 예언을 트럼프에 적용해서 “트럼프가 고레스다”고 해석한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그 고레스 대왕은 아니다. 트럼프가 고레스와 같은 사역을 한다는 의미다.
‘달의 연인 보보심경’ 드라마에서 이준기는 왕소역을 맡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4째 아들, 광종이다. 드라마에서 광종은 이준기다. 그렇다고, 이준기가 그 광종은 아니다. 광종처럼 그 심령과 사명으로 연기를 할 뿐이다. 실제 인물과 그 인물의 재현은 다르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여주인공은 매년 바뀌지만, 그 명성황후는 유일하다. 일본의 여우사냥에 의해 살해된 그 명성황후는 역사적으로 1명뿐이다. 역사적으로 그 엘리야도 1명 뿐이다.
그 인물과 그 사역을 놓고, 구분해서 이해를 해야한다. 요한복음은 “그 인물”에 대해 물은 것이고, 마태복음은 “그 사역”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엘리야의 사역을 담당하는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것을 잘못 알아듣고, “세례요한=엘리야”라고 단세포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은 분명히 “엘리야와 모세의 영혼”을 목격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말한 그 엘리야는 세례요한이다”라고 설명했다.
영혼이 살아있는 갈멜산 전투의 선지자 엘리야는 따로 존재하고, 세례요한은 엘리야처럼 불의에 맞서서 대항하는 선지자로 활동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처럼 활동했고, 그 실존적 엘리야는 아니다. 또한, 엘리야의 영혼이 세례요한 속에 “쑥” 들어가서 활동하는 ‘미신적 망상’은 버려야한다. 엘리야는 성령충만으로 살았다. 그와같이, 세례요한도 성령충만으로 살았다. 사람의 영혼을 받아서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령충만, 예수의 성령을 받아야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한다.
“추출 기법”은 이렇게 자주 활용되면서,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추출된 결과물이 본래 성경원문과 뜻이 같은지, 반드시 비교검토해야한다.
누가복음 1:35과 1:56을 추출해서, 2개의 사건만을 연결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는 사가랴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대표적인 ‘추출의 오류’다. 누가복음 1:35에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믿음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은 창조주의 능력이다. 그런데, 3달동안 사가랴 집에 머물렀다는 것과 결합해서, 엉뚱한 해석을 하면, 그 결과물이 “성령잉태설”과 정반대다.
나는 ‘장창훈’인데, 누군가 ‘이창훈’으로 부르면, 나는 결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원문이 의미하는 근본뜻을 바꾸는 것은 ‘성씨’를 바꾸는 것과 같다. 매우 조심해야한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말씀으로 임하여 잉태해 탄생했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창조주의 전지전능을 어찌 믿지 못하는가? 우주창조 빅뱅은 믿으면서, 창조주의 성육신은 왜 믿지 못하는가?
성령잉태설을 부정하는 사가랴 잉태설, 엘리야의 재림부활설은 사람의 몸에 사자의 머리를 붙인 것과 같은 기괴한 성경해석이니, 속아서는 안된다. 재림부활설은 ‘영혼결혼식’과 ‘영혼접신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 영혼접신과 영혼결혼은 미신적 무당들의 행위일 뿐이다.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임해야 구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