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사건이 개별이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흐른다. 혹은 그렇게 보여진다. 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로서, 진보적 관점을 차용한다. 뿌리는 보수다. 무엇이든, 사회체제를 유지해야하고, 기득권층이 있음으로, 그 부모세대로부터 자식세대가 나왔고, 자식세대는 미래세대로 유산을 물려줄 책임이 있다.
인헌고 재학생 150명이 서명한 ‘인헌고 학생수호연합)이 인헌고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학생은 정치적 노리개가 아니다”고 그들은 당당히 정치적 신념을 발언했다. 정치교사(전교조) 8명의 이름을 실명으로 공개하려다가, 명예훼손이 우려돼, 보류했다. 실명을 공개했다면, 역풍을 맞았을 우려가 높다. 한국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도(道)가 있기 때문이다. 인헌고 학생들은 적당한 선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후배들을 위해 좋은 전통을 세웠다.
정치교사는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학생은 손들어라”고 공개적으로 물어봤다고 한다. 창조적 비판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심어줄 수 있어야하고, “진보가 틀릴 수 있음”을 진보 교사들도 인정한다면, 제자들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왜 인헌고 150명(재학생 500명)이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했을까? 그것은 학생기록부 때문이다. 고3은 학생부 기록이 끝나고, 교사들의 압력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표현의 자유가 폭발한 것이다. 지금이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교실에서 ‘나이와 교권’으로 학생의 사상을 억압할 수는 없다.
종교적으로 기독교는 ‘보수’(保守)에 속한다. 보수(保守)는 무조건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수와 진보는 관점의 차이다. 진보(進步)는 앞으로 걸어간다는 뜻이다. 사회체제를 놓고, 관점을 말한 것이다. 보수는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진보는 사회체제를 ‘변화’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을 말한다. 진보주의자는 사회구조를 바꿔야한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엇을 바꿀까? 보수는 사회구조 대신에, ‘사람’을 바꾼다. 보수는 사람을, 진보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보수는 본래 ‘사람의 인성’을 바꿔서, 사회구조를 바꾸도록 하는데,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서 기득권에 눌러 앉아서 권력독점을 하다보니, 욕을 먹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헤롯당이 로마권력을 독점했고, 안나스 가문이 대제사장 종교권력을 독점했다.
공산주의는 최고의 진보주의다. 러시아에서 1919년 10월, 붉은 혁명이 일어났고,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모든 사회구조를 바꿨다. 그들의 경제는 결국 모두 잘살길 원했으나, 공평과 평등으로 모두 가난해지는 나라가 되었다. 소련은 70년후 해체됐다. 진보주의는 “말”로 그칠 때가 많다. 사회구조를 바꾸면, 뭔가 새로워질 것 같지만, 그것은 까페를 옮기는 것에 불과하고, 집을 이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집을 바꾼다고 인생에 행복이 찾아오는가?
사람이 바뀌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성령으로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그것이 보수(保守)다. 보수의 다른 이름은 ‘사람 만들기’다. 그래서, 진보교사들은 자신들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면 안된다. 요즘 학생들은 교사보다 똑똑하다. 학생에게 배우는 교사가 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인헌고 학생들의 기자회견이 진보교사 8명을 새롭게 변화하는 ‘봉침’(蜂針)이 되길 희망한다.
** 인헌고 기자회견과 김정은 위원장의 금강산 철거 발언을 비교하면, 북한의 독재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사상주입이고, 우상권력이며, 무조건적 찬양인지 알 수 있다. 인헌고 학생들은 정치교사 밑에서 3년동안 북한의 독재정권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누구도 사람이 사람의 사상을 족쇄로 눌러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고 말씀했다. 자유로운 사상을 누르고 억압하는 것은 진리를 역행하는 지배권력이다. 크든, 작든, 모든 곳에서 억압의 교육은 사라져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