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곱교회는 계시록 편지를 받아보고, 매우 당혹했을 것이다. 보여지는 현실과 초현실적 약속의 괴리감은 ‘의심’을 낳기 마련이다.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말하고, ‘평화통일’을 약속해도, 우리는 믿지 않는다. 전문가의 말이라고 해도 현실감과 너무 떨어지면, 신빙성이 사라진다. 일곱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았으니,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약속한 영적 유산을 4장에서 연결해 보여준다.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들의 실상이 계시록 4장에서 현실로 묘사된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으니, 이곳이 현실이다. 그러나, 30년 후에는 어디가 현실일까? 넉넉히 계산해서 100년후에는 어디가 현실일까?
하나님은 첫째날 빛을 만드시고, 둘째날 물과 물을,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었다. 우리는 아랫물로 창조된 우주에서 살고 있고, 계시록 4장은 윗물로 창조된 영적 세계를 뜻한다. 아래에서 위로 가려면, ‘문’이 필요하다. 야곱이 광야에서 봤던 그 사다리가 ‘열린문’으로 연결될 것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문을 열어줘야 그곳을 들어갈 수 있다.
“이리로 올라오라”
(계시록 4:1)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그 교회는 열린문을 약속받았다. 열린문은 성전기둥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 요한도 그 열린문으로 올라가서, 하늘의 풍경을 목격했다. 하늘의 보좌들이 펼쳐져 있고, 하나님의 보좌와 둘러진 24보좌들이 있었다. 보좌가 1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치, 귀빈석을 위해 준비된 좌석과 흡사하다.
사데 교회에는 일곱 영을 가지신 주님이 나타나 그들에게 “흰옷”을 약속했다. 그런데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있고, 일곱영은 하나님의 일곱영이며, 일곱 등불로 존재한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등불비유가 나오는데, 상호참조를 해볼만한 구절이다.)
또한, 두아디라 교회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이 나타나셨는데, 네 생물들이 무수한 눈들을 가지고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 “거룩하다”는 경탄의 언어를 3번이나 연거푸 사용하고 있다. 금관을 쓰고 있던 24장로들이 금관을 주님께 드리면서 역시 경배와 존귀와 감사를 드린다. 금관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서머나 교회에 약속한 증표다.
에베소 교회에 약속한 생명나무의 열매는 계시록 후반부에 자세히 기술되고, 버가모 교회의 ‘검’도 후반부에 나온다. 계시록 후반부에서 ‘칼’로 주님이 싸우셨는데, ‘니골라당’임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일곱교회 편지와 계시록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면 안된다. 니골라당은 시대마다 계속 출현했다. 공산주의도 니골라당이다. 창세기 3장에 나온 뱀의 말이 니골라당이다.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한 가룟유다의 주장이 니골라당이다.
우리는 니골라당을 극히 조심해야한다. 루터 시대에는 교황의 칙령과 면죄부 정책이 니골라당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 니골라당은 시대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나며, 하나님도 시대마다 빛의 아들들을 새롭게 성령으로 빚으신다.
돈과 권력에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크게 책망을 받고, “보좌”를 약속받았다. 그 교회 성도들은 엄청나게 충격받았을 것이다. 주님께서 “토해내겠다”고 했으니, 심판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약속한 그 보좌에서 이어져 하늘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로 시작한다.
그들은 안약을 사서 눈먼 소경을 벗어났을까? 성도들의 회심이 보좌에 앉게 하는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켰을 것이다. 교회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이다. 믿는 성도가 말씀을 버리고, 세상적으로 잘 된다면, 그것은 세상을 위한 어둠의 잔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묵시록의 경고장이다. 돈이 많고, 풍요로운가? 그것이 주님과 상관이 없다면, 주님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말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