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에게 약하다. 무소불위 권력자도 여자에게 끌려간다. 헤롯왕도 헤로디아의 치마폭에 놀아났고, 그녀의 딸이 춤을 추자, 권력의 칼춤으로 세례요한을 죽였다. 부국강병을 이룬 아합왕도 이세벨 때문에 엘리야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그 이세벨은 ‘우상숭배’의 상징이 되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유혹한 거짓 선지자가 이세벨로 불렸다.
여자는 여우처럼 무섭다. 아담도 아내가 선악과를 주니까, 먹고서 에덴동산 직장에서 해고됐다. 목회사역을 뺏긴 것이다. 성도가 하와 1명이어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교회는 교회다. 여자를 이용하는 전략전술을 ‘미인계’라고 한다.
에스더서 5장에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각오로 임했는데, 그것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미인계’로 통한 것이다. 세상은 계획적으로 미인계를 활용한다면, 하나님은 성령을 그 심령에 부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하게 하신다. 에스더는 3일 금식을 하면서 민족을 위해 슬픔의 탄식을 한 것인데, 그것이 다이어트가 되었다. 영적 다이어트는 “금식기도”다.
호박죽이나, 전복죽을 먹고 나갔을까? 사람이 죽을 각오로 어떤 목표를 설정하면, 3일 굶어도 새벽별이 뜬다. 성령께서 임하면, 세상 것을 굶어도 배부르다. 예수님은 유대광야에서 40일을 굶었어도 마귀가 주는 밥을 먹지 않았다. 절벽같은 교회 꼭대기에 놓였어도 마귀의 능력을 빌리지 않았다. 밑바닥 인생을 살았어도 마귀의 권력앞에 절하지 않았다. 그 마침표가 십자가이니, 십자가는 구원의 증표다. 3일 금식은 곧 3일 무덤과 연결된다. 에스더는 제 3일에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에게 나아갔다.
왕은 욕정이 올라왔다. 권력자가 누군가를 품겠다고 하면, 어찌 못하리요. 그런데, 에스더는 33일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않았으면서, 왕의 사랑을 받았어도 그것을 물리치면서,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라고 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세상 것들이 풀려지면,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민족이 죽을 운명인데, 어찌 남편의 사랑이 중요한가!! 인생은 죽을 운명인데, 어찌 구원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리요!!
에스더는 그날 똑같은 말을 2번 반복했다. 한번은 왕궁의 안뜰에서, 또 한번은 잔치를 베푼 후에 말했다. 한번은 하만이 없는 곳에서, 다른 한번은 하만이 있는 곳에서 했다.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하만과 함께 오소서”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두 문장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왕과 하만을 위하여’라는 그 말이 왕의 심장을 찔렀을 것이다. 왕이 왕후와 사랑을 하겠다는데, 그 잔치에 왜 하만이 와야할까? 하만의 권력이 그 정도로 막강해진 상황이었다. 에스더를 통해 하만의 존재가 아하수에로 왕의 인식에서 드러난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우상권력 뒤에 숨어있었는데, 실상 하만속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서 우상권력의 실체를 은밀하게 폭로한 것이다. 하만이 교만하니, 아하수에로 왕은 그 하만이 보이기 시작한다.
믿는 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고난과 역경을 당해도 담대할 것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에스더가 왕좌앞에 나가듯, 우리는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가야한다. 사도 요한도 열린 문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면서 영적인 시각이 새롭게 열렸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이것같고, 저것이 저것같지만,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쳐다보면, 지각있는 분별력으로 생명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