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가 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줄듯 말듯’하니, 마음이 뒤숭생숭해진 아하수에로 왕은 잠을 설친다. 밤에 잠이 안올 때는 역사책을 펼쳐 보는 습관을 가진 자들이 많다. 아하수에로 왕도 잠을 자려고 역사 일기를 읽었을 것이다. 영화 에스더에 보면, 지혜로운 에스더는 책을 읽어주는 궁녀에게 “역대일기에서 모르드개 사건”을 읽어주도록 지시한다. 과연, 우연히 펼쳤는데 모르드개 이야기가 나왔을까? 에스더가 의도적으로 계획해서 그것을 읽게 했을까? 하나님의 지혜가 에스더에게 임재해서,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통해서 그 모략을 베풀었을 것이다.
하만의 암살은 사실 ‘암살사건 신고’에서 비롯됐다. 암살미수 사건이 종결되고, 목숨이 위태로워진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세워서 전권통치를 맡기고, 우상의 권력 뒤에 숨어 버렸다. 2:23에 보면,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뢰고, 조사하여 사실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했다”고 되어 있다. 모르드개의 의로운 행위에 대한 보상은 없었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선악간에 판단해서 상벌을 확정하신다. 모르드개의 입장에서 죽음의 고난이 찾아왔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 결국, 기록된 그 궁중일기를 아하수에로 왕이 보면서 “보상의 때”가 온 것이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지금 당장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출판한다고 해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 것도 아니다. 일기는 자신이 보고, 책은 주변의 사람들이 읽는다. 그 일기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책이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자극해서 변화시킨다. 책 1권의 1문장이 1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일기를 써야하고, 책을 출간해야한다. 모르드개의 암살범 신고 사건이 궁중일기에 몇줄로 기록되었을 것인데, 그 역사적 기록이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바꾸고, 사건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나무에 달려서 죽을 위기에 처한 모르드개가 ‘존귀함의 영광’을 얻게 된 결정적 기술이다.
6장 6절에 매우 중요한 성경해석의 관점이 나온다. 우리는 하만처럼 성경해석을 하면 안된다. 아하수에로 왕이 말하길,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물으니, 하만은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말이 다음과 같다.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왕의 신하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에스더 6:7~9)
왕의 말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했는데,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대부분 이단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한다. 비슷한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그 주인공을 “자신”으로 푼다. 왕의 심중을 누가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랴!! 하나님의 마음은 오직 성령께서 아시고,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구원의 창조자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가 존귀함을 받을 자들에 해당한다. 예수님을 존귀하게 찬양하는 자가 예수님의 존귀함을 받게 된다. 왕이 은혜를 베푼 이유는 왕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존귀’라는 단어를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니, 하만은 ‘가장 존귀한 자’를 에스더로 풀고,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하만 자신으로 풀었다. 그러나, 왕은 ‘가장 존귀한 자’를 ‘하만’으로 풀고,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모르드개로 풀었다. 결국, 하만의 간구는 상달되어 실현되었다. 성경해석은 자기중심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 해석이 이뤄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통해서 펼쳐진다. 십자가를 버리는 곳마다 구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