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모섬에서 요한은 어린양이 보여준 것을 보았다. 그는 목격자다. 그 시대 참된 증인으로 로마 권력에 항거했고, 그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당했다. 조선시대에도 곧은 선비는 왕에게 직언하다가 추방당하고, 유배를 떠났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절대사상’을 가지고, 짐승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음으로, 밧모섬에 갇혔다. 갇힌 곳에서 하늘이 열렸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두지 못한다.
성경학자들은 “요한이 그 사도 요한인가”를 놓고, 오랫동안 검증하고, 논의하고, 확인하면서, “아닐 확률이 높다”는 방향으로 상당히 기울어졌다. 요한복음 문체와 요한계시록의 문체가 너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쓴 자’와 ‘확인한 자’ 사이에 ‘사도 요한’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서, 그의 이름으로 전달된 것으로 해석하는 성경학자도 있다. 문체는 작가의 지문과 같아서, 바뀔 수가 없다. 나도 나의 문체가 있다. 이것은 속일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요한 계시록이 가장 늦게 정경에 포함됐다.)
요한이 본 것이 왜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이 보여준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때, “요한이 본 것”은 “예수님이 알게 하신 것”이다. 1:1이 그것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다. “알게 하신 것”이 곧 “요한이 본 것”이다. 내가 무엇을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께서 알게 하신 것인가? 출처확인이 매우 중요하다.
주님의 눈은 불꽃같고, 네 천사들은 그 속에 엄청난 ‘눈들’이 있다. 성령은 곧 예수님의 거룩한 영혼으로, 우리가운데 들어오면, ‘생각의 눈’이 되어서, 주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과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된다. 이것이 주님이 알게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밧모섬은 감옥이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감옥이 곧 천국이다. 하늘은 위에서 열린다. 지옥은 밑에서 열린다. 천국과 지옥 모두 문의 열쇠를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창조주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영혼의 구원도 창조하셨다. 구원의 창조주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이름이 너무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길 기뻐하신다.
1:10에 요한은 나팔소리를 들었다. 그때, “성령에 감동되어”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 성령의 귀로 그것이 들린 것이다. 성령에 감동되지 않으면, 성령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요한은 “큰 음성”을 들었는데, 성령의 소리는 인간세상에서 ‘미세한 소리’로 나타난다. 성령에 감동되면, 그 소리가 확성기처럼 크게 들린다. 마치 이어폰을 끼듯 그렇다. 성령의 충만함은 ‘이어폰’과 같다.
계시록 1:7에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그가 창조주 하나님으로, 신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 나타날 것이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도 신적인 존재로 나타났고, 제자들에게도 그러했다. 문이 닫혔으나, 그곳을 통과했고, 그들이 먹는 생선을 잡수셨고, 디베랴 호수에서는 떡과 생선으로 숯불구이를 준비하고, 제자들의 조반을 준비하셨다. 제자들과 로마군병이 깜짝 놀래도록, 시체가 증발되는 육체부활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구름타고’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신적인 전능자’로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 베드로의 증언을 받고, 양심에 찔린 자들이 많이 돌아왔다.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에 해당된다.
“구름타고 오시리라”의 그 문장만 추출해서, ‘구름’을 다시 추출해서, ‘구름은 증인들’로 풀이하는 것은 전체문맥에 맞지 않는 좁은 해석이다. 그러한 해석도 ‘증인의 중요성’을 부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증인들로서 그 사명을 입증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도 오직 요한이 본 것을 증언케 하심으로 ‘신적인 능력’을 보이셨다.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을 ‘청중’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청중을 흩음으로 능력을 나타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