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골라는 ‘영지주의’ 또는 ‘초율법주의’를 뜻한다. ‘구원파’가 곧 니골라당과 흡사하다. “구원을 받았으니, 무엇을 해도 죄가 아니다”는 사상은 종교적 금수저로서, 특권적 선민사상이고, ‘우상의 본거지’이다. 구원을 받은 것과 죄악은 별개 문제다. 구원을 받았어도, 죄의 환경은 산재하여, 날마다 근신하면서 살아야한다. 니골라당은 지식으로 포장된 ‘용의 교리’다.
니골라당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많았으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에베소 첫편지에서 ‘니골라당’을 언급했고, 버가모 셋째 편지에서도 니골라당이 나온다. 에베소 교인들은 니골라당을 미워하나, 버가모 교인들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니, 책망을 받았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발람의 우상제물’과 밀접하게 상관있다. 선민사상은 ‘양심의 화인(火印)’과 같아서, 죄를 죄로 모른다. 선민사상은 곧 ‘짐승의 표’와 같다.
계시록은 어린양과 큰용의 싸움이다. 어린양은 하나님의 도장을 찍고, 큰용은 용의 도장을 찍는다. 니골라는 ‘백성을 지배하다’는 뜻이다. 짐승의 권력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 당’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짐승의 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리가 사상을 더럽히면, 사람은 그대로 행한다. 황제 우상숭배처럼 보여지는 짐승의 표가 있고, 교회안에 몰래 스며든 짐승의 표도 있다. 만약, 교회가 중세사회 교황처럼 짐승의 권력으로 넘어가면, 성도는 어찌 해야할까? 암담한 일이다.
예수님은 큰용과 싸웠다. 버가모 교회에서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니골라당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싸우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니골라당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다. 표는 손과 이마에 받는다. 그것은 사상과 행위다. 생각이 점점점 물들면 철학으로 굳어지고, 행위가 계속 지속되고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반복은 곧 중독이다. 표를 받은 것은 ‘중독’이다. 그래서, 어린양의 피에 중독되고, 진리의 말씀으로 물들어야한다.
정통교회에 있든, 이단교회에 있든, 결국 선한 양심을 지키면서, 십자가의 피흘림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한다. 그것만이 영혼이 살 길이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존재여서, 금새 세상으로 흘러간다. 영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람의 영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의 영광이 곧 짐승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섬김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랑으로 이 땅을 창조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섬김을 다하셨다. 그 사랑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요, 사랑의 유언장이 십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