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셨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당했다. 창세기 2장과 3장 사건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받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다. 아담에게는 에덴동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나안 땅이 허락됐다.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했다. 그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전쟁마다 ‘묻고’ ‘응답받고’ 행하도록 말씀했다.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 7일의 비밀작전은 완벽했다. 그런데, 승리하면, 그 순간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착각한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서 여리고성이 함락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탐하는데 정탐꾼을 보내고, 그들이 “3천명이면 충분하다”고 하니,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곧바로 허락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철저히 패배했다. 아간의 범죄때문이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아간의 범죄를 발각하고, 군대통솔권을 다시 하나님께 의탁했다. ‘복병전략’의 응답을 받고, 여호수아는 ‘거짓 패배’의 전술로 아이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의 북방 세겜까지 차지했다. 아이성은 작았지만, 북방으로 진격하는 교도보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거지 복장’으로 항복한 기브온 족속에게 ‘평화조약과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때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했다. 하나님께 물었다면, 다른 대답을 했을 수도 있다.
기브온 산당을 공격하는 ‘아모리 5개 연합군’과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와 ‘기브온 평화조약’ 사건으로 ‘하나님께 묻고 행하기’의 중요성을 진실로 깨달았다. 그래서, 기브온이 군사동맹을 요청하자, 하나님께 묻고, 속히 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갔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았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전략이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박”이 쏟아지니,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가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행해야 하니, 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조종해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보다 좋은 것을 주신다. 사람이 보기에 좋아도, 하나님이 ‘금지’하면 안하는 것이 유익이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이 주는 깊은 교훈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전체’를 분명히 주셨다. 그러나, 그곳에서 모든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면 패배했고, 묻고 행하면 승리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허락했어도, 계시와 지혜의 영을 간구하면서, 하나님께 선악의 판단을 묻고 행해야한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2가지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하나님과 함께 가셨던 것이다.
인생의 모든 길, 운명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선택해야한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면, 흑암의 골짜기에 들어가도 어둠이 물러가는 승리를 얻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길이 평지 같아도 함정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에덴동산에서도 ‘선악의 판단’은 반드시 하나님께 묻고 행해야한다. 하물며, 영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십자가는 인류를 위한 ‘영원한 구원의 증표’다. 참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들을 위해 남겨준 결혼반지가 곧 ‘십자가’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나무를 금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여호수아는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묻고 전략을 간구했고, 아모리 5개 연합군과 전쟁에서도 하나님께 묻고 전쟁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 바로 ‘선악나무의 열매’를 스스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금지된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주실 때, 먹어야한다. 이스라엘은 1천년 정도 가나안 땅에 살다가, 결국 이방민족의 우상문화에 점령당해서, 아담처럼 가나안땅에서 추방당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잃으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