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사명의 주된 목적을 ‘검’으로 비유했다. 그 검(劍)은 좌우의 날 선 검이다. 니골라당 교훈에 빠진 버가모 교회를 향해 ‘좌우의 날선 검’을 입에 가지신 주님이 “내가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싸우겠다”고 경고했다. 검(劍)은 ‘싸움과 전쟁과 분쟁’이다. 누가는 “검”을 “분쟁”으로 풀어서 기록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바람을 핀다면,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랑하므로 현장을 덮쳐서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므로, 바람피는 우상을 용납할 수가 없다. 우상은 마귀의 숙주(宿住)다. 각종 병원균이 신발속에, 신발장속에 숙주하듯, 우상에는 더러운 마귀가 살고 있다. 분칠한 우상에 속아서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처럼, 남편처럼, 아내처럼 사랑한다. 참 신랑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이다.
참된 제자도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10장은 12사도를 파송하면서 예수님이 ‘제자도’를 교육한 설교다. “화평 대신에 검”을 말씀하기 바로 직전에,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곧바로 가족공동체를 향한 ‘전쟁선포’를 하셨다.
첫째, 기존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이 형성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듯, 혈육의 가족은 해체되고 주님과 새로운 가족이 된다.
둘째, 사랑하는 가족이 우상이다. 아담은 아내속에 숨은 뱀의 혀를 알지 못했고, 하와는 직장동료속에 감춰진 뱀의 유혹을 알지 못했다. 친밀감속에 마귀는 똬리를 틀고 있다. 유의해야한다. 성령충만함으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면, 마귀는 어둠에 속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빛이 가면, 어둠은 드러난다.
셋째, 가족을 진정 사랑한다면, 가족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한다. 가족이 마귀에 붙잡혔다면, 어찌 화목할 수 있는가?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가족의 현실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그들과 영적 전쟁을 해야한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다. 검은 곧 십자가다. 말싸움에서 가족을 이기라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검으로 대속의 승리를 하라는 뜻이다. 주님은 양날의 검을 입에 가지고 ‘대속의 피흘림’으로 승리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피옷을 입고, 성도에게 흰 옷을 입히신다. 이것이 대속의 전쟁이다.
날선 검으로 자신을 찔러, 대속의 피흘림으로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패배”함으로, 하나님의 포로가 되자, 에서의 군대도 경호대로 바뀌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께 패배함으로 주님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 끌려가는 바벨론 포로는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이다. 칼을 칼집에 꽂고, 십자가의 검으로 대속의 전쟁을 해야한다. 이것이 참된 이김이다.
마태복음 10:34~39은 가족공동체를 해체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제자의 마음속에서 가족을 버리도록 촉구한다. 오직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은 마음의 영역에서 먼저 출발한다. 마음속에 가족이 가득하면, 남편이 가득하면, 아내가 가득하면, 자식이 가득하면, 섬기는 스승이 가득하면, 하나님이 임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임재하면, 그 하나님께서 가족을 지키실 것이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① 고향과 분쟁 ② 아버지와 분쟁 ③ 동업자 롯과 분쟁 ④ 아내 사라와 분쟁 ⑤ 자식 이삭과 분쟁을 주셨다.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분쟁했고,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도 모리아산 번제사건으로 서로 쪼개졌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하나님의 품에 맡겨야한다. 그것이 참된 부성애(父性愛)다. 어머니는 자식을 성령의 품에 맡겨야한다. 이것이 참된 모성애(母性愛)다. 자식을 끝까지 고집하면, 그것이 라헬의 드라빔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 즉 익숙한 것들이다. 나의 원수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주님은 믿는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 성도는 누구나 죄를 사하는 능력을 받았다. 곧, 성전기능이다. 어떤 이단 교주의 말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교주에게 지은 죄는 그 교주가 용서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께 지은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 기도의 번제로서, 십자가의 희생으로서, 주님께서 남기신 피흘림의 대속으로서, 죄사함의 효력이 발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믿는 자마다 작은 구원주가 되어서 살아간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 20: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