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4편]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 오랫동안 성경읽는 습관을 갖고, 내 자신을 분석하면, 복음서를 날짜별로 읽는 것이 가장 자유스럽고, 내 자신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성령의 충전이 잘 되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유의 날개가 달린다. 성경을 읽고, 성령으로 생각하고, 신문을 읽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글의 자취를 남긴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자주 “작가”가 되도록 권면한다. 또한, 평범한 주부가 글쓰는 능력을 보이면, 나는 깜짝 놀랜다. 평범한 직장인이나 여대생이 글쓰는 습관을 갖고, 일기를 날마다 쓴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나는 글쓰는 사람이 무척 좋다. 글쓰는 사람은 정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거울이 있어서, 진실하다. 나는 날마다 글을 쓰면서 나를 새롭게 빚고, 창조하고, 성령으로 단장한다.
빛과 소리는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 존재는 우리의 몸의 접촉점에서 번역될 뿐이다. 이미 과학세계는 그것을 증명했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소리가 고막을 때릴 때, 번역되어서 뇌가 인지하는 것이다. 빛도 동일하다. 빛은 결코 물이 컵에 담기듯 우리 몸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들어오면, 몸은 망가질 것이다.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는 사람의 몸을 독립체로서 완벽히 구분했다. 사람이 물질을 섭취해도, 필요한 영양분만 흡수될 뿐, 나머지는 그대로 배출된다. 완벽한 독립이다. 사람의 정신세계도 동일하다. 세상의 뉴스를 접할 때, 경계면에 ‘성령의 화염검’이 있다면, 하늘의 언어로 번역되어 흡수된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번역될지, 그것을 결정할 자유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속에 역사하는 성령이 행하신다. 성령께서 협력하면, 세상의 뉴스가 번역될 때 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흡수될 것이다. 인식은 곧 해석의 범주다.
뉴스도 이미 번역된 사실이며, 그 뉴스를 접할 때, 역시 사람은 인식의 경계면에서 번역으로 받아드린다. “번역은 반역이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은 50%의 의미반감을 가져오고, 나머지 50%는 자신의 인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자신의 해석이 없다면 번역도 없다. 이것을 겸허히 인정해야한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형상을 받았으니, 피조물로서 ‘죄의 물질’을 가졌고, 창조주의 형상으로 ‘창조성’을 가졌으니, 하나님을 떠나서는 물질세계를 다스릴 권능도 없다.
홍콩 지방선거 뉴스를 읽었다. 지방선거에서 친중파 정치인들이 낙선했다. 반중파 민주진영이 압승했고, 친중파는 몰락했다. 투표율은 70%다. 중국정부가 앞으로 홍콩을 다루는 정책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대한민국 군사정권이 전라도 광주의 민주항쟁을 무력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이 패배했다. 피흘림의 무력으로 자유의 날개를 꺽을 수는 없다. 과연, 나는 마음에서 자유한가? 자유하다면, 그 출처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성령께서 날마다, 매순간, 함께 하시는가? 진실로 물어야한다.
시진핑도 자유를 말하고, 홍콩 시민들도 자유를 말하고, 김정은도 자유를 말하고, 문재인 대통령도 자유를 말하고, 황교안 대표도 자유를 말하고, 트럼프도 자유를 말하고, 모든 인류는 자유를 동경한다. 그런데, 저마다 자유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단식투쟁에 나선 황교안 대표의 글이 내 마음을 울린다. 물론, 그도 정치인이니, 정치적 의미가 반영된 글이 분명하다. 촛불집회가 한참 열리던 그 때, 그는 권력을 잡은 자였고, 지금은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인이다. 그가 만약 청와대에 들어가면, 또한 어떻게 변화할까? 그것은 그때의 일이고, 지금 그는 차가운 땅에 누워서 국가의 비통한 현실을 걱정한다. 단식 6일째 황교안 대표가 페북에 적은 글은 다음과 같다.

(누워있는 사람)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91125. 문화일보 5면 발췌)
“간밤 성난 비바람이 차가운 어둠을 두드린다. 이 추위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잎은 떨어뜨려도 나무 중지를 꺽을 수는 없다.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고통은 고마운 동반자다. 육신의 고통을 통해 나라의 고통을 떠올린다. 저와 저희 당의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거적 너머 보이는 국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래서 제게 소중한 스승이다.
– 황교안 대표의 페이스북 글 ”
자유민주주의여!! 우리가 어떻게 상속받은 국민의 권리인가!! 지금 홍콩 시민들은 중국과 대항해서, 중국정부를 상대로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었다. 이것은 분별력이다. 누가 진정 촛불의 눈물로 살고 있는가? 이 나라를 걱정하는 슬픔은 황교안 대표나 문재인 대통령이나 동일한 단면이며, 결이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슬픈 베옷을 다시 입고, 정치의 어른들이 우리 미래를 지켜주길 희망한다. 우리의 미래가 홍콩처럼 암울해서는 안될 것이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것인데, 북한과 통일을 위해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자유의 죽음’이다. 대한민국이 작지만,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듯이, 대한민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엇이 부족한가!! 그들은 자유가 없는 종의 쇠사슬에 묶였고, 그 굴레가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서 감금되었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대한민국이다. 자유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자들이 진정 누구인가? 촛불의 주인이 누구인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이 되길 바란다. 이념의 눈치를 보는 비굴한 정치인들이 양심을 회복하길 바란다.
One Comment
Pingback: [5편] 질문의 자유 | 서울교육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