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5편] 질문은 자유하다. 표현의 자유에는 ‘질문’도 포함된다. 국회의원과 기자는 동등권으로 ‘질문의 권한’이 주어진다. 국회의원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행정부를 비판할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기자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비판하기 위해 ‘질문’을 할 자유가 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답변할 자유가 있고, 거부할 자유도 있다. 질문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격형 질문, 다른 하나는 궁금증의 질문이다. 공격형 질문은 상대의 마음을 찌른다. 화살과 같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식권력을 가진 자들이며, 기자들도 “시나리오”를 설정하고서 질문을 던진다. 나쁜 질문이다.
반면, 궁금증의 질문은 상대가 말하도록 도와주는 질문이다. 상대의 대화를 촉진하는 질문으로, 하브르타식 질문이다. 대화식 질문은 후자에 해당하는데, 대한민국의 토론은 대부분 전자의 질문이 많다. TV 토론회가 상대를 공격하는 질문을 보여줘서 그런 것이다. 2가지 질문의 차이를 구분하는 사람은 화법의 핵심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대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질문은 대화를 위해 ‘화제를 던지는 기능’을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도 2가지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두가지 질문은 정반대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해주기 위해서, 병자의 의향을 정확히 물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공동체의 공동 집필진은 사도 요한을 통해 설교를 들었던지, 혹은 38년된 병자의 간증을 들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통해 당시 영적인 모든 상황을 담아냈다. 병자로서 받고 있는 율법적 혜택을 포기하면서, 지금 당장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병이 치료된 후에 격게 될 불편한 상황까지 정확히 알려줬다. 병자는 그것을 알고서 선택한 것이다. 단점과 장점을 모두 알려주는 것이 정직이며, 양심이다. 예수님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그것이 안식일법을 범하는 것을 그 병자도 알았고, 율법을 어기면서 병자는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칼을 품은 질문을 던졌다. 유대인들은 복음서 곳곳에서 자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은 기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자주 한다. 국회의원들이 과연 장관을 불러놓고, 궁금해서 묻겠는가? 말꼬리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엮는 것이다. 그런 질문은 검사들과 경찰들이 자주 사용한다. 경찰이 피의자를 불러놓고 질문을 하게 되면, 이미 시나리오가 짜여있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증거가 있고, 없는 증거가 있는데, 피의자는 경찰이 갖고 있는 증거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니까, 경찰의 질문에 걸려든다. 경찰은 상당히 교묘한 고등 사기꾼이다. 나는 경찰을 매우 싫어한다. 그들은 사람을 절대 믿지 않고, 자신의 공적을 위해서 선량한 시민도 범죄자로 만든다. 죄인을 찾는 것이 경찰이 아니다. 죄인을 만드는 것이 경찰이다. 유대인들이 그런 사고를 가졌다.
병자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면 안된다. 왜냐면, 안식일법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범죄자를 잡으라고 하니, 경찰은 범죄자를 만들기 위해 증거까지 조작한다. 유대인들은 고침받은 병자를 통해 ‘예수님이 고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질문은 자유한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이 달라진다. 그래서, 자신이 대화를 할 때, 어떤 질문을 하는지 자신을 살펴볼 줄 알아야한다.
언젠가 어떤 협회를 방문했는데, 신제품을 개발한 사업가가 협회장을 상대로 물건을 홍보하고 있었다. 물건은 상당히 좋은 제품인데, 협회장도 관심을 보였는데, 그 사장은 혼자서 말하고 있었다. 3분 정도 말했을 때, 협회장이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니까 협회장은 제품보다 사장의 말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이다. 말을 계속 듣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귀의 고막이 계속 울리면, 그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말을 하고, 듣고, 말을 하고, 듣고를 반복해줄 때 사람의 뇌는 흥미를 느낀다. 계속 듣기만 하면 지루하다. 나는 집에서 글을 쓸 때, 타이핑을 치면서도 혼자서 문장을 읽는다. 청각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나는 서서 타이핑을 친다. 앉아서 타이핑을 하면 상당히 피곤하다. 서서 타이핑을 하고 다리를 계속 움직이면서, 발바닥에 펌핑을 해주면(제자리 걷기) 하지정맥을 통해서 피가 올라오면서 온몸의 혈액순환이 원할해진다. 발바닥을 통해 걸어야만 정맥의 피가 중력을 이기고 심장까지 갈 수 있다. (발의 자유는 큰 신발을 통해 가능하다. 나는 260mm 발크기인데, 280mm 신발을 신는다. 발의 자유, 발가락의 자유를 위해서다. 무지외반증은 하이힐과 작은 신발때문에 생긴다.) 이런 모든 것은 감각이 균형있게 반응하는데 도움을 준다.
질문하는 법과 관련해서, 인터뷰식 질문이 대화에 도움이 된다. 인터뷰식 질문은 상대의 질문을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을 ‘질문속으로 문을 열다’로 표현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내가 어제 겨울왕국 2를 봤어”라고 했다면, “그래? 어땠어?”라고 물어주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심층적으로 물어주는 것이 ‘질문속으로 들어가는 질문’이다. 반면, “그래? 나는 겨울왕국 2를 안봤는데, 나는 겨울왕국 1을 봤어. 그런데 겨울왕국 1은 별로였어”라고 말을 한다면, 그 대화는 더 이상 진정이 없고, 끝난다. 대화는 상대의 말에 장작을 넣어주면서 불이 붙는다. 상대의 말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물을 뿌리면 대화는 금방 냉냉해진다. 화법(話法)은 화법(火法)의 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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