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으로 시작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의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으니,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독생자로 낳으셨고, 말씀의 독생자가 이 땅에 얼굴을 보이셨으니,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얼굴을 이 땅에 그대로 드러내신 분이다.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말씀이셨다.
영어회화를 교육하는데, 영문법을 배우다가 세월이 흐른다. 영문법을 벗어나면, 영어회화의 자유가 있다. 국문법을 잘한다고 글을 잘쓰는 것이 아니다. 국문법과 글쓰기는 전혀 별개다. 받아쓰기 모르고, 철자가 틀려도 글쓰기를 잘하는 작가가 많다. 맞춤법과 글쓰기는 별개다. 영문법과 영어회화는 전혀 상관없다. 말하기는 말함으로 입이 열린다. 그처럼, 말씀과 교리는 전혀 다르다. 교리의 틀에 갇혀서 말씀의 생명을 잃으면 안된다. 교리는 몽학선생과 같아서, 말씀의 윤곽을 보여주는 역할이며, 말씀의 문을 열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어떤 교리는 말씀의 문앞에 서있으면서 성도들이 말씀으로 들어가는데 막고 있다. 그런 교리는 극히 조심해야한다. 지혜롭게 보여도, 말씀의 문을 열지 못하면, 뱀의 지혜일 뿐이다.
나는 날마다 1년동안 탐독했던 신앙서적을 읽는다. 시간이 많을 때는 많은 서적을 읽고, 시간이 없을 때는 하루에 3~4권을 조금씩 분량대로 읽는다. 일정부분만 읽고, 아래 책상으로 내려놓으면, 1주일 후에는 다시 한바퀴를 순환하면서 읽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앙서적을 탐독하면서 내가 터득한 새로운 진실은 모두가 부분적으로 주장하며,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견해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보다 성경원문에 가까운 내용이 무엇인지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책과 책을 서로 참조하며 표시하고, 3~4권의 책을 펼쳐놓고, 자유로운 생각으로 칼럼을 쓴다.)
어떤 신학서적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설명하면서, 현란한 신학용어를 사용하는데, 과연 그런 책을 집필한 이유를 묻고 싶을 정도다. 왜, 이런 책을 썼을까? (또, 나는 왜 이런 책을 샀을까?) 문장과 문장이 서로 헝클어져서, 무엇을 말하는지도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뜻을 3~4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한다. 읽다가 덮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책을 조금씩 읽는 것으로 바꿨다. 1권의 책속에 매몰되면, 그 사람의 사상에 빠져든다. 어떤 신학자의 책을 조금만 읽고, 그것을 분석하고, 다른 책의 의견으로 그 책의 주장을 비교하고, 내 생각을 반영하면서 깊게 궁리한다. 이러한 방법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내게 유익을 많이 줬고, 내 생각의 자유를 허락했다.
복음서는 단순하다.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다.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했느냐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고, 예수님께 궁금한 것을 물었고,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했지만, 보기좋게 배신했다. 그것도 현장에서 3번이나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예수님이 재판석에 섰는데, 베드로는 증인으로 출석해서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또 나타나서, 사랑을 확증했다. 베드로를 향한 그 사랑이 믿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베드로처럼 만났는가?
주님은 추상적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추상적으로 사랑한다면, 빌라도와 헤롯왕과 가룟유다와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주님은 특정한 몇 사람만 구원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사연이 얽히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른 자들만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지금 시대도 동일하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가? 말씀이신 주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가? 그 만남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가? 교리에 의해 구름을 보듯 망상으로 주님을 만나는가? 주님을 말씀으로 직접 대면하는가? 복음은 주님을 만난 이야기다. 주님을 만나야, 구원이 임재한다.
인생은 결국 죽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알렉산더도 진시황제도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죽음앞에 무너졌다. 주님은 1평의 땅도 정복하지 못했지만, 죽음을 이겼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3일 후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죽음의 땅을 정복하고, 사망을 다스리는 주님이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면 사망을 이긴다. “사망을 이긴다”는 말이 ‘영생’이다. 주님을 믿으면 영원히 산다.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말씀으로 날마다 주님을 만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