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은 땅이요, 흙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성령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은 땅에서 왔으나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한다. 성경본문은 땅의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그곳에 성령의 지혜가 들어가면, 구원의 능력이 생긴다. 성경본문의 뜻에 생명을 불어넣는 분은 성령이다.
“용각산은 소리가 다르다”는 광고 문구가 있었다. 소리가 다르다.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유명한 신학대에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면 안된다. 말을 들어보고, 그 말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그 말씀에 입각해서 그 사람은 살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야한다. 상당히 저명한 신학자가 “2단계 칭의론”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가? 2단계 칭의론은 이단에서 주장하는 구원론과 비슷하며, 세속종교는 대부분 ‘행위구원론’을 따른다.
행위구원론은 성도의 행실을 요구하면서 교세확장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행위구원론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2단계 칭의론도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하나의 교리이다. 그 교리가 예수님의 근본진리를 가린다면,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예수님의 말씀을 택할 것인가? 그 교리를 택할 것인가?
예수님은 삼위일체를 말씀한 적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믿는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삼위일체를 믿을 것인가?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성령을 믿을 것인가? 교리는 예수님을 더욱 깨닫게 하는 조명의 역할일 뿐이다. 신학교리를 신주단지처럼 신봉하다가, 교리를 우상숭배하는 ‘교리이단’에 빠질 수도 있다. 극히 조심해야한다.
누가 이단이고, 누가 진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구원을 주는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자유롭게 살아야한다. 신학교리는 구원을 주지 못한다. 포장지는 선물이 아니다. 포장지를 뜯어야 선물이 나오듯, 교리를 뜯어야 그 속에 진리가 있다. 교리자체는 껍질에 불과하다. 교리의 포장지를 뜯었을 때, 무엇이 나오는지 그것을 알아야한다. 이단의 교리를 뜯었을 때, 그 속에서 이단의 교주가 나온다. 지혜로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 내용물이 심판이었다. 교리는 이와 같다.
생각해보라!! 이단 교주들도 자신들의 자유를 따라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한다. 2단계 칭의론을 주장하는 그 신학자에게 구원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신학자도 자신이 깨달은 그 자유를 따라 성경을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교리에 갇힌 성도들의 미련함이다. 그 신학자가 자신의 자유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듯, 모든 성도도 자신의 자유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면서 창조주의 성품을 따라 성경으로 살아가야한다. 이것이 진리의 성령을 받은 자의 자유다. 그 해석이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면, 성령께서 그 말씀의 해석에 따라 영혼을 자유케 할 것이다.
[롬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靈)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중략)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로마서 2장 후반부에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의 정의가 나온다. 옛날 신라시대에 육두품 제도가 있었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혈통을 따지다가 그 나라는 멸망했다. 행위구원론은 결국 보이는 사람을 중심하고, 자신의 공적을 따라 파벌이 갈린다. 파벌이 갈리는 곳에는 내분이 생길 것이고, 공동체는 와해되며,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영에는 자유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속에 할례를 해야한다. 어떤 신학대를 나왔다고 자랑할 것 없다. 성령이 그 마음속에 임재하지 않으면 세상 지식일 뿐이다. 성령으로 말해야한다.
로마서 1:28에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라고 했다. “내버려 두심”은 2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하나는 죄인을 죄속에 내버려 둔다. 다른 하나는 의인을 죄속에 내버려 둔다. 의인을 죄속에 내버려 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이다. 예수님은 내버림을 당함으로 죄인의 대속물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상실한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가능케 되었다.
마음속에 무엇이, 누가 있는가? 마음속에 남편이 있음으로 남편되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마음속에 아내가 있음으로 아내된 성령을 더욱 사모할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상실(喪失)은 없음이다. 없음의 은혜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게 된다면, 그것이 창조주의 축복이다. 창조주는 없음에서 있음을 만드셨다. 사람의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을 때, 창조주가 그 수면위에 임재한다.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많으면, 하나님은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 여기서 ‘상실한 마음’은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이다.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가 있고, 세상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가진 자가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모두 가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