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효”를 말씀하셨다. 반면, 공관복음은 “효”보다 “천효(天孝)를 말씀하신다. 천효(天孝)가 곧 순천(順天)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순천자(順天者)이다. 마가복음 3장은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친 사건, 12사도 임명, 바알새불로 가짜 뉴스가 터진 사건, 가족들까지 예수님을 핍박한 사건이 나온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됐다. 법이 정한 ‘선악과’다. 주님은 그 선악과를 담대하게 따먹으셨다. 법을 범하면서 생명을 살리셨다. 생명을 살림으로 법을 폐지한 것이다. 율법전체를 폐지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법의 몇 개 조항을 폐지한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 병자와 이방인을 위해서 안식일법은 ‘족쇄’와 같았다. 그 법률을 폐지함으로 병자와 이방인을 위한 안식일이 되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가복음 3:33)
누가 참된 대제사장인가? 누가 그 병자를 고친 의사인가? 누가 참된 선지자인가? 누가 참된 율법주의자인가? 누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가? 손 마른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안식일법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외면하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일꾼인가? 사람을 위하랴! 하나님을 위하랴! 안식일법을 범할지라도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역자다. 이것은 교회활동에서 자주 거론된다. 안식일법은 교회법을 말한다. 그 조직과 공동체의 규율을 어기면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면, 공동체의 규율이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공동체 규율은 폐지해야한다.
마음이 삭막한 자들이여!! 주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한탄하셨다. 법 때문에 사람의 심령이 병들었다면, 그 법은 악법(惡法)이다. 악법을 지키는 자가 정의인가? 악법을 범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자가 정의인가? 주님은 악법을 범하면서 그 생명에 자유를 선물하셨다. 신호등이 고장났으면, 빨간불에도 무단횡단을 해야한다.
예수님은 3개의 공동체가 충돌하는 현장에 있었다. 예수님의 나사렛 고향 공동체, 그들은 가족과 친족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가 예수님을 걱정했다. 나쁜 뉴스가 퍼지니, 가족이 예수님을 걱정했다.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공개적으로, 의도적으로 범하니 유대공동체가 예수님과 충돌했다. 그리고, 가버나움 제자 공동체가 있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제자 공동체를 ‘신앙의 가족’으로 여기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말씀으로 ‘제자 공동체’의 문을 열어두셨지만, 사실상 가버나움 제자 공동체를 새로운 가족으로 여기셨다.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그 판단기준이 무엇인가? 판별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까지 희생시키면서, 생명을 살리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상천국과 지상지옥은 백지 한 장 차이다. 지상천국과 지상지옥은 모두 ‘지상천국’의 비젼으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지상지옥’을 만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상천국을 목표했지만, 지상지옥으로 끝난다. 예수님의 지상천국은 세상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교회가 세워지면, 그 교회를 통해서 세상이 정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권력이 서서히 정화되고, 그렇게 300년이 지나자 로마제국의 황제도 전도되었다. 만약, 교회의 정화기능이 실종되면 어찌 될까?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버려짐을 당한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생활이다. 교회는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소금의 짠 맛’과 ‘십자가 진리의 빛’을 비쳐야한다. 그 기능이 유지되면, 세상은 썩지 않고, 결국 진리의 빛이 비추므로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교회가 썩으면, 구제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