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를 읽을 때,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느브갓네살 왕과 바벨론 정치인들은 다니엘의 영적 능력을 보면서, “사람의 지혜”로 추앙하지만, 최소한 다니엘은 그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을 통해 왔음을 알고 있다. 그 증거가 ‘꿈’이다. 꿈은 자신이 꾸고 싶다고 꾸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과 같다. 만물도 본래 하나님께 만들어서 주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꿈이 하나님을 통해 왔듯, 권력도 명예도 지혜도 하나님을 통해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 성령의 소리에 고요히 귀를 기울여야한다. 느부갓네살은 정반대로 행했다. 꿈과 해석을 받은 것은 ‘말씀’을 받은 것과 같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권세를 주면서, 신상을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하게 했다. 왕권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꿈과 해몽을 듣고, 바벨론 왕국이 위험해진 것을 깨달은 황제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권력을 강화한 것이다. 느부갓네살 황제는 ‘꿈과 해석’을 인간의 지혜로 받아드린 것이다. 꿈과 해석을 받은 사람은 황제와 다니엘인데, 반응은 정반대로 나왔다.
그리고, 다니엘의 세친구가 고발을 받았다. 정치인들의 권모술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은 본받아야한다. 신상앞에 그냥 고개만 숙이면 되는 것인데, 세 친구는 그것을 결코 하지 않았다. 풀무불에 던져져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을지라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세 친구는 결단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은 마귀가 주는 밥은 먹지 않기로 작정했다. 마귀가 주는 것은 어떤 것도 취하지 않았다. 권력과 능력과 밥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면, 예수님은 그것을 취하지 않았다. 마치, 다니엘과 세 친구가 1장에서 왕의 산해진미를 거절한 것과 흡사하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황제의 권력밑에서 ‘요직’을 맡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황제가 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이 절대신앙이다.
이단교회는 이런 정신이 없다. 교주중심이다. 북한과 똑같다. 북한에서는 독재자를 중심해서, 권력이 만든 ‘교리’에 입각해서, 마네킹처럼 움직인다. 이단교회는 교회가 알려준 교리안에서 벗어날 자유가 없다. 정통교회도 ‘교리’가 너무 강조되면,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이 임재할 수가 없다. 교회는 성도의 심령이지, 건물이 아니다. 교회에 충성할 것인가? 하나님께 충성할 것인가?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누구를 진정 예배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거대한 신상을 만든 것은 ‘권력의 신격화’ 작업이다. 어떤 조직도, 어떤 교회도, 하나님 외에 사람을 우상시하면, 그곳에는 마귀가 역사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심판을 예정한다. 이단교회가 특히 그렇다. 성도의 숫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상이 세워지면, 그 우상에 절하면서 우상이 주는 떡을 먹는 자가 있고, 우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 권력의 핍박을 받는 자가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이 주는 떡을 먹지 않고, 풀무불에 던져졌다. 종교적 핍박은 ‘출교’로 나타난다.
“우상숭배”가 단순히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3장 4~5절을 보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각종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면서 금신상에 절을 했다. 이것은 예배다. 찬송가를 부르듯, 군가를 부르듯, 금신상을 세워놓고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제국을 찬양했던 것이다. 이단교회가 교주를 찬양하는 것은 북한의 우상숭배와 동일하다. 사람은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운 것은 그 권력의 주인이 자신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위대한 정신을 상속받아야한다. 다니엘 세친구는 권력에 밉보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담대하게 걸어갔다. 권력자의 뜻대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냈다. 이것이 성도의 인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