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4장과 5장은 대략 4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그 사이에 3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생략됐다. 벨사살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다. 유다의 마지막 왕과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서로 대비된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포로로 끌고 왔을 때가 BC587년,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와 메대의 다리오 왕이 연합해서 바벨론을 멸망시킨 때가 BC539년이다. 4장과 5장은 바벨론의 멸망 직전이다.
그 사이에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을까? 모세처럼 초야에 묻혔다. 이 때 연세는 대략 70~80세다. 느부갓네살 왕때 종교 장관을 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다니엘이 정권에서 밀려나 유대인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어느날,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시다가 ‘손가락이 쓴 글자’를 보면서, 어떤 왕비가 “다니엘을 부르소서”라고 한다.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을 부른다.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잊혀진 모세를 찾아갔다. 부르심은 그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찾아와 부른다. 요셉을 불렀던 것도 잊혀진 ‘술장관’이었다. 죽음에 처한 야곱을 불렀던 것도 그의 인식에 ‘죽었던 요셉’이다.
“메네 메네 데겔 우파르신(베레스)” (무게 무게 길이 나눔)의 아람어다. 4개의 단어가 쓰였으니, 그 의미를 해석하려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접속사와 연결어미를 넣어야한다. 어떤 문장을 넣을지, 빈공간을 채우시는 분은 성령이다. 단어 4개를 연결해서 만들 수 있는 뜻은 너무 많다. 그러나, 손가락이 쓴 그 단어의 뜻을 아는 자는 손가락의 주인공일 것이다.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그 글을 본 벨사살을 향해 말한 문장이다.
그가 가장 잘못한 것은 첫째 대리자로서 아버지 나보니다스가 고레스-다리오 연합군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궁궐에 앉아서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피를 흘리면서 싸우고, 권력을 위임받은 아들은 술을 마시면서 흥청망청 즐겼으니, 그 나라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벨사살은 ‘그루터기’의 뿌리조차 남겨지지 않았다. ‘나눔’은 그의 나라가 쪼개져서 멸망한다는 암시였다. 마치, 솔로몬이 죽고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쪼개져서 왕권이 넘겨지듯 그러했다. 바벨론은 잔인한 국가였다. 적군을 죽이면, 그 땅에 소금을 뿌려서 경제력을 말살시켰고, 손목을 잘라서 생존하지 못하게 했다.
4장과 5장이 시간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부친”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벨사살 왕의 아버지가 느부갓네살 왕인 것으로 쓰였으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바벨론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부친’(아버지)는 조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느부갓네살왕과 벨사살왕은 그 사이에 3명의 왕이 있었고, 나보니다스 황제의 아들이 벨사살 왕이며, 벨사살은 대리자로서 왕권을 가졌다. 부통령으로서 궁궐을 지키는 왕이 곧 벨사살왕이다. 그래서,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3번째 자리”를 제안한다. 벨사살이 2번째 직위에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권력에서 밀려나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심령에 충만하게 살았고, 부름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청년의 때처럼 ‘총명’이 사라지지 않았다. 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세상지식은 나이와 상관이 있다. 하늘의 지혜는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젊으나 늙으나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지혜가 생긴다. 이것이 하늘의 지혜다. 다니엘은 그 지혜를 받았다. 성령께서 그 뇌속에 빛을 주시면, 모르는 것도 알 수 있다. 벨사살왕이 저울에 달린 것은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꾼 그 꿈의 예언이 성취됨이다. 그 기간이 대략 40년이다. 예수님의 성전멸망 예언도 40년만에 이뤄졌다.
우리 인생은 저울에 달면, 죄밖에 없다. 그런데, 구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울에 달릴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죄의 무게는 주님께서 담당하셨고, 의의 무게도 주님께서 주셨다. 칭의(稱義)는 구원을 말한다. 의(義)는 “무죄”와 “자유”를 동시에 선포하며,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다. 한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다. 칭의(稱義)를 받으면, 성령과 함께 살아간다. 이것이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