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늦었다. 일어나라”고 재촉하지 않으신다. 달리다쿰!! 엄마가 딸을 부르듯, “아이야, 이제 일어나렴!!”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장례식에 참여해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사건이다. 혈루증 여인은 주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혈루증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면서 병이 치유됐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주님은 영혼구원의 은혜를 선물하신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병이 낫겠다는 그 믿음이 ‘단초’가 되어, 병이 고쳐졌다. 신유의 능력이 역사한 의학적 과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주님은 능력이 나가서, 혈루증을 고쳤다고 말씀하셨다. 혈루증 여인의 그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병을 고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병의 치유사건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셨다.
누구를 보는가? 주님을 봐야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을 봐야한다. 주님이 사람을 통해 말할지라도, 주님을 봐야한다. 내가 이단교회에 있으면서 가장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람을 중심한 것이다. 그 교주를 통해, 교주의 편지를 통해, 교주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 기도의 응답을 들어준 것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쳐다봐야한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황제를 중심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쳐다봤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 왕앞에서도 직언했다. 80세 노인으로서 얼마나 당당했을까? 고레스 황제 시절에도 다니엘은 “페르시아의 멸망”을 예언으로 받는다. 큰 짐승 넷 환상과 ‘숫양과 숫염소 환상’이 그것이다. 알마나 위대한 다니엘인가? 고레스 황제 밑에서 1등 공신에 책봉되어서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텐데….. 예루살렘을 향해 날마다 3번씩 기도하고, 나중에는 21일 금식기도까지 한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소녀야 일어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소녀는 그때 일어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했다. 제자들은 일어났지만, 함께 가지 못했다. 여자 제자들만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심령의 죽음을 당한 제자들은 소녀처럼 죽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의 심령도 다시 살아났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의 말씀이 이뤄진 것이다.
깨워보면, 시간차이로 일어난다. 벌떡 일어난 사람이 있고, 5분후에 일어난 사람이 있고, 1시간 후에 일어난 사람이 있다. 각각 다양하다. 육체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부르심을 믿고, 일어나야한다.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자마다 육체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육체로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사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죽어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으니, 육체가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죽음의 강을 넉넉히 건너간다. 죽음의 무덤을 지나 넉넉히 일어날 것을 믿는다. 죽음은 홍해와 같아서, 부활의 주님께서 사망을 건너게 하실 것이다. 육체로 살아있을 때 주님을 믿지 못하면, 어이할꼬!!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했다. 그 말씀이 바로 인류를 향해 주어진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그 말씀이 모든 소녀들에게, 소년들에게, 청년들에게, 중년들에게, 노년들에게 주어진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의 주님께서 일어나셨듯이 우리도 일어나야한다. 주님은 무덤속에서 3일만에 일어나셨다. 주님은 2천년 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지금도 계속 부르고 계신다. 삶의 잠에서 일어나, 복음으로 돌이키자!!
** 나는 이단의 무덤에서 30년만에 일어났다. 이것은 거의 기적이다. 하루가 10년이면, 3일만에 일어난 것이다. 주님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