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월동준비(越冬準備)다
[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날마다 복음앞에 마음을 내려놓고 싶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도, 복음을 묵상하며 하루를 살아야한다. 각종 세상 뉴스와 직장과 보여지는 현실에 매몰당하지 않을 영성을 갖기 위해서, 인생은 몸부림을 쳐야한다. 북한은 권력의 독재정권이 하늘을 덮고, 남한은 경제의 맘몬신이 죽음의 영성을 가린다. 영성은 ‘죽음’에서 출발한다. 즉,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
십자가는 태초에 예정된 하나님의 절대 계획이다. 태어날 때 죽음이 확정되듯, 선분은 점에서 점까지 거리이듯, 출발한 우리는 도착할 지점까지 갈 뿐이다. 탄생과 죽음은 인생의 운명이다. 그처럼, 태초의 창조는 ‘십자가’로 끝나기로 정해졌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다.
48세, 중년이 되면서, 옛날같지 않다. 늙어가는 소식이 내면에서 들려온다. 음식맛이 없어지고, 옛날 일들이 그리워지고, 청춘의 때가 한없이 우울해지고, 감각은 아둔해진다. 그때마다 나는 “엘리의 어두운 마음이 내게 있지 않게 하소서”라고 눈물로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85세 갈렙처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호소한다. 하나님께 깊은 탄식으로 내 자신을 인정하면, 허무한 내 마음에 창조주의 능력이 임한다. 영성은 무(無)를 깨닫는 인식이다.
나는 복음서를 날마다 1장씩 읽는데, 어제는 못 읽었다. 책을 출간한다고, 복음서 읽는 일에 게을리했다. 물론 다니엘서를 읽었지만, 하나님께 약속한 복음서의 1장을 못 읽었다. 그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을 읽었다. 읽으면서, “왜 마가는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을 복음전파의 중간에 넣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기본질문이다. 성공한 인물에게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지듯 그렇다. 마가는 분명히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연대기적 서술은 아니다. 연대기적 서술이라면, 복음전파 이전에 세례요한이 순교를 당했으니, 그 앞에 적혀야 한다.
간혹, 조선일보와 한겨레도 이러한 편집방향을 취한다. 신문1면에 나오는 사진과 그날의 헤드라인은 독립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상호 연결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진편집이다. 마가도 예수님의 복음전파와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을 상호 연결해서 배치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이 바로 뒤에 나온다. 오병이어 기적은 복음전파 이후에 사도들의 권면을 듣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5천명 야외집회’를 했던 사건이다.
세상 뉴스라면,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은 빼야한다. 중간에 들어가서, 열두제자 파송이 5천명 선교로 확장된 ‘교세확장’의 소식을 가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불길한 소식을 넣은 마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세례요한은 세례요한, 예수님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백성들속으로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데….. 왜 “죽음”을 거론하는가?
기독교인은 영원히 “죽음”을 직면해야한다. 죽음을 망각한 성도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물”이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창세기 2장에서도 분명하게, 생명나무 옆에 사망나무를 뒀다. 그 사망나무가 ‘선악나무’다. “네가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따먹으면 죽는 나무가 곧 사망나무다. 죽음을 망각하면, 인생은 향락에 빠지고, 돈에 빠지고, 권력에 빠진다. 죽음을 기억함으로 세상의 것들을 피조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아햔다. 예수님은 12사도를 파송하면서 “십자가”를 확정했다. 그 복선이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에 깔려있는 것이고, 마가는 그것을 드러내서 말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는 헤롯 안티파스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세례요한처럼 죽게 됨을 말하고 있다.
복음전파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결정된 사건이다. 생명의 탄생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지 않는 생명은 없다. 복음의 생명력은 ‘십자가’로 끝난다. 세상 모든 나라, 권력, 돈, 사랑도 죽음이 있다. 그러나, 십자가만 ‘부활’을 말한다. 십자가는 죽음의 문을 열어주는 영생의 통로다. 십자가의 대속이 없었다면, 인생의 유한성이 참혹하게 비참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아침에 새벽말씀을 들었다. 근면한 목회자의 영성이 성령으로 충만하므로, 더욱 성령충만으로 행하시길 성령께 간구했다. 새벽말씀은 “초상집과 잔치집”을 말한 잠언서를 토대로 전해졌다. 죽음을 잊게 하는 최면제와 같은 자본주의의 향락앞에서 기독교인은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야한다. 겨울이 오기전에 “월동준비(越冬準備)”를 하는데, 인생의 겨울을 준비해야한다.
** 글을 쓰고 다시 보니, 어제 마가복음 5장을 읽었다. 이렇게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오!!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