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내버리심”은 “하나님을 버릴 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심판이다. 자유의지로 일어난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기로 결심했을 때, 말씀을 범함으로 말씀을 버린 것이다. 양자택일이다. 그런데, 하와도 아담도 지혜롭게 보이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말씀을 지킨다고 착각한다. 모든 종교, 모든 성도, 모든 이단종교까지 그렇다. 내가 이단종교에 있었을 때, 나의 신앙심은 특별했다. “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교리가 진리로 인식되니, 알 수가 없다.
내 엄마는 내게 자주 전화를 하신다. 하물며, 성령이시랴.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하시면, 이런 말, 저런 말, 하신다. 하물며 성령이시랴. 성령과 성도의 사귐에는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한다. 내가 있었던 이단종교 총회장 목사는 ‘성령에 대한 강한 특권의식’이 있었다. 1m안에 성령이 자신에게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 지도자는 청중과 있으면서도 성령과 대화를 한다. 그가 영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 그 누구든지, 그러한 열심은 배울 필요가 있다. 단지, “자신에게만 성령이 있다”는 성령독점사상은 ‘독재정권’과 같아서, 위험하다. 단상에 임하는 성령이 성도에게 흘러넘친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회의에서 스스로 간증한 것을 깊게 새겨야한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함을 받은 사도바울이 성령을 어떻게 증거하는지, 알아야한다. 성령은 특정 인물에게 속하지 않는다. 세습당하지도 않는다. 상속자는 오직 성령을 받은 자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지식적 설명이 불필요하다. 상속분쟁의 법정 소송이 없다면, 성령과 사귐에는 성경을 통해 날마다 이뤄진다.
나는 기독교 교리를 존중하지만, 난해한 미적분 학문같은 교리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 성령은 그렇게 임하지 않는다. 고넬료가 교리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세상지식이 발달하고, 공산주의와 인본주의가 지능이 높아지므로,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림으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교리의 기둥’도 필요하지만, 성도들이 항상 주의해야할 것은 ‘성령의 근원’이다. 성령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베드로가 선포했어도,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 성령을 받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자유롭게 행하면서, 삶에 충직할지라!!
나는 이단교회를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버리는 공포에 빠졌다. 그러나, 사람의 종교를 떠나는 것에 불과했다. 성령은 각자 심령가운데 임한다. 그 누구도 성령과 성도의 교제를 막지 못한다. 성령은 자유를 허락하며, 날마다 성도의 심령을 찾아와 말씀을 하신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거룩한 기도와 예배와 성도들과 교제에 힘쓰면서 살아야한다. 그 누구도 성도의 마음를 괴롭게 해서는 안된다. 성도의 마음속에 성령이 있다면, 어이하랴!! 성경의 모든 것을 통달해도, 성령과 사귐이 없다면, 성경지식은 장애물일 뿐이다. 사도바울은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 성경지식의 목적은 그리스도요, 성령의 임재다. 그리스도를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으로 알아가는 것이 성령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