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은 칠병이어 표적이 나온다. 마가복음은 사건의 편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맹인과 귀머거리와 앉은뱅이에게 전해졌다. 누가 맹인이며, 귀머거리이며, 앉은뱅이인가? 믿는 성도들이다. 성도들은 날마다 맹인이며, 귀머거리이며, 앉은뱅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죽음 이후에도 부활의 복음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못 봤고, 부활의 주님을 몰라봤다. 눈뜬 소경이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막8:18)
제자들을 책망한 말씀이다. 책망의 복음이 제자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제자들이 복이 있다. 못 듣고, 못 보므로, 주님께서 빛(光)이 되셨다.
8장 앞에는 “에바다”로 벙어리면서 못듣는 병자를 고친 사건이 나온다. 실제 병자인데, 마가는 의도적으로 칠병이어 표적앞에 이 사건을 실었다. 제자들이 ‘에바다 병자’와 같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열려라”고 하니, 말하면서 듣게 된다. 4천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제자들은 주님을 증거할 줄을 모르고, 말씀을 전할 줄 모른다. 그때 주님은 칠병이어로 축사하고, 나누어 주면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제자들의 입이 다시 열리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4천명의 무리가 배불리 먹고, 일곱광주리를 거뒀다. 엄청난 표적이 일어난 것이다. 표적의 핵심은 ‘에바다’이다.
주님은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했다. 권력의 유혹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칠병이어 표적 다음에 이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이 모이면, 반드시 마귀가 있다. 여름철 풀속에는 뱀이 기어간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뱀이 함께 섞여있다.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뱀은 확연히 드러난다. 뱀은 권력의 머리요, 따르는 무리의 꼬리를 가졌다. 추종세력이 있다면, 뱀이 역사한다. 그것을 짐승의 권력이라고 한다.
벳새다 맹인은 2번 눈을 떴다. 베드로 고향이 벳세다이다. 벳새다 맹인의 표적 다음에 베드로의 고백이 있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반대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분적으로 깨달았다. 베드로가 깨달은 주님은 “세속적 그리스도”이며, 바로 헤롯권력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그리스도’를 말한다. 주님은 군사정변을 통해 무력을 쟁취하는 그리스도를 거부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대속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주님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방법이 ‘십자가’다. 헤롯의 누룩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의 누룩’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헤롯의 누룩을 없애기 위해서는 ‘누룩’을 없애야한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래서 주님은 칠병이어 표적, 오병이어 표적에서 무리를 흩어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막6:45)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막8:10)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6:15)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뱀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등산을 떠난다. 깊고 깊은 곳, 높고 높은 곳, 사람이 올 수 없는 헤르몬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계신다. 인생도 그런 ‘고독의 정상’에서 주님을 만나야한다. 권력에 취해 살다가는 음녀의 짝이 되기 십상이다. 권력은 뱀의 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