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읽는 것은 ‘역사책’을 읽는 것과 같다. 왜냐면, 로마제국이 멸망했고, 유대인은 거리가 멀다. 로마서의 설정 자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로마서는 그 의미가 퇴색된다.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을까? 로마서의 독자는 누구인가? 이방인이라고 대답해겠지만, 부분만 맞다. 로마서의 독자는 브리스길라이다.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들 40명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송하면서, ‘파송의 설교’를 했다. 그와같이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으로 40명의 동역자를 긴급파송하고, 로마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로마제국에 잠입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멕시코의 장벽을 넘어서 미국에 밀입국한 난민과 같다. 로마시민이 아닌 자들이 로마제국에 들어갔고, 그 당시 로마제국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중에서 유대인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거부하지 않은 정통 복음주의자로서,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다. 그들이 로마제국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웠다. 최초 교회다. 로마서는 그들에게 보낸 편지이지, 로마제국에 있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 것이 아니다.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동역자다.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가 있었다면, 바울에게는 브리스길라가 있었다.
로마서를 읽을 때, 2가지를 유념해야한다. 로마서를 집필한 장소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은 로마서를 집필했다. 집필내용은 곧 고린도교회 상황과 직결된다. 3~4달 동안 집필하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해 설교를 했을 것이다. 설교내용이 책이 되고, 책이 곧 설교내용이 되었다.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는 상호 연결된다.
로마서가 집필될 당시만 해도 유대교가 정통이었고, 기독교는 신흥종교에 불과했다. 자생력이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유대교와 함께 협력공동체를 이루려고 목숨을 내걸었지만, 기독교로 전향한 바리새인들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했다. 율법에 가려진 복음의 정신은 바울을 통해 재발견된다. 로마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거룩한 제사’를 감당했을까? 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려지고, 이스라엘은 예수님께 버려지고, 그들은 주님과 결별했을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예수님과 유대교가 나뉨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다. 버려짐이 없었다면 맞이함도 없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버려짐으로 이방인이 그 영광을 얻었다면, 유대인들이 맞이함으로 그 영광은 어떠하겠는가? 바울은 이방인을 향해 ‘교만의 경고’를 하고 있다. 말씀을 따라 살았던 유대인은 말씀에 이르지 못하고, 말씀을 거부한 이방인은 말씀이 그 마음에 임했다. 그렇다면, 말씀을 따라 사는 유대인에게 말씀이 임한다면 그 열매가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천년이 지나고, 유대교보다 기독교와 천주교가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종교가 되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분명, 죄인과 세리가 ‘탕자’였다. 주님은 그들을 부르러 왔다. 마태와 삭개오와 베드로와 버려짐을 당한 그 시대 가난한 자들이 ‘탕자’였다. 그런데, 유대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탕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장자인가? 탕자인가? 예수님 시대에는 분명 로마가 이방인의 나라였으나, 지금은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졌다. 로마서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그리스도의 복음앞에는 무익함을 말하고 있다. 사명을 높든 낮든, 모태신앙이든 아니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하지만, 만약에 유대인처럼 하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다가 형식주의자로 변질되면, 어쩌랴?
순종함으로 살았던 유대인은 순종에 이르지 못하고, 유대인의 불순종으로 이방인에게 긍휼이 베풀어졌으니, 그렇다면, 이방인의 순종함이 훗날 유대인의 순종을 위함이라면 어쩌랴!! 그 누구도 하나님앞에서 순종을 자랑할 수 없다. 이방인은 본래 불순종함으로 긍휼을 입었으니, 순종을 자랑하면 순종에 이르지 못한다. 순종과 불순종은 은혜의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자를 사랑함으로 택해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 설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에세 배제함이 아니고 긍휼을 얻기 위해 잠시 버려둠에 가둔 것이면 어쩌겠는가?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거룩하다. 처음익은 곡식가루는 예수님이고, 떡덩이는 오순절 때 120명의 제자 공동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예루살렘이 있었으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함으로 구분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했으나, 3일후에 다시 부활의 은혜를 입었다. 그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한 것처럼 보일 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입는다. 이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영원히 배제된다면, 믿는 성도들도 구원에서 영원히 배제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확증했다. 어찌,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위해서만 부활하셨을까? 이방인들을 위해서만 부활했다면, 어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을까? 복음의 시초를 기억함으로 이방인에 속한 성도들은 낮은 마음을 가져야한다. 그것이 로마서의 저변에 깔려짔다. 낮은 마음은 곧 유대인들의 버려짐을 반면교사로 삼고, 나아가 유대인들의 버려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존귀한지 깊게 새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