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장과 요한계시록 1:9을 함께 읽어보면, ‘인자의 영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반찬가게가 있는데, 처음엔 장사가 잘됐다. 목포가 고향인 그 아줌마는 욕심의 지경을 넓히더니, 어느날 새로운 종류로 가게를 확장했다. 다름 아닌 ‘오뎅’이다. 오뎅이 중앙을 차지하니, 사람들이 몰렸다. 그것이 화근이다. 오뎅집인지, 반찬집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된다. 그러다가 손님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바알 아니면 하나님이다. 권력 아니면 십자가다. 십자가는 세상권력을 거부하는 ‘순종의 절대성’이다.
마태복음 4장을 봐도 명확히 드러난다. 답은 0 또는 1이다. 결정해야한다. 경제와 권력과 능력과 지혜를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이쪽은 마귀가 주는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명예’이고, 저쪽은 하나님이 주는 ‘말씀’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마가복음 13장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헤롯성전을 지어놓고, 세상권력에 빠져버린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 동쪽에서 멀어야, 서쪽에 가깝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봤다. 다니엘은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었고, 고레스 왕(다리오 왕)의 칙령을 거부함으로 사자굴에 던져졌고,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 환란과 기근과 버려짐은 인자의 영광이 나타나는 전조현상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들은 판단해야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촛대인가? 아닌가? 그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은 헤롯성전의 멸망을 예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촛대가 옮겨진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 금 촛대가 나오는데 그것은 성전안에 놓여진 금촛대를 말한다. 그런데, 주님은 금촛대가 곧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촛대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앞에 ‘하나의 성전’이다. 땅은 성전이다. 그곳에 교회가 촛대로 존재한다.
요한계시록 성경주해(바클레이) p83에 따르면, 구약성경에서는 대제사장의 옷을 가르켜 ‘발까지 닿는다’라고 해석한다. (출28:4, 레16:4) 대제사장으로서 주님이 ‘교회의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 성도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교회의 촛대’다. 촛대가 거룩하면,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오늘도 교회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 주님은 반드시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 촛대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촛대는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였다. 그처럼 주님은 교회의 촛대를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촛대가 있는 교회를 통해서 날마다 성도들과 교제한다. 주님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바로, 금촛대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며, 금촛대를 통해 성도의 행실이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요한은 3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이다. 여기서 읽는 자는 성경 봉독자를 뜻한다. 옛날 초대교회에서는 성경봉독이 특권이었고, 거룩한 직분이었다. 설교와 동일한 직책으로서 평신도 중에서 7명을 선출해서 그 사역을 감당하게 했다.(요한계시록 성경주해 p56) 누가복음 4장에서도 주님은 이사야서를 봉독한 후에 “이 예언이 이뤄졌다”고 선포했다. 성경봉독의 직책과 설교를 함께 행하신 것이다. 성경봉독과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현대교회로 번역하면, 설교자와 듣는 성도와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가 복이 있다.
요한계시록 성경주해 p62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옛날에 있던 제우스, 이제 있는 제우스, 장차 올 제우스”라고 제우스를 숭배했고, “제우스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제우스는 머리요, 몸이다. 제우스에게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제우스에게 붙여진 것이다. 우상은 무엇인가? 곧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챈 자들이다.
이단교회가 잘되는가? 숫자가 급증하는가? 그렇다면,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는가? 그것을 물어봐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없다면, 그저 ‘종교단체’에 불과하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세상의 영광이니, 인생 낭비하지 말라!! 하나님이 떠난 단체의 결속력은 조만간 헤롯성전처럼 무너질 것이다. 숫자가 많든 적든, 인자의 영광을 봐야한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님을 만났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헤르몬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봤다. 막달라 마리아는 공동묘지 근처 주님의 무덤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숫자는 미세먼지에 불과하다. 세미한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세상의 소리가 커질수록 성령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을 멀리하고, 세속을 제거해야 미세한 성령의 소리가 상대적으로 볼륨이 커질 수 있다. 엘리야는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
“요한은 밧모섬에 있었다.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 성경주해 p81 발췌)
이 문장은 누가복음 4:1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광야에서 주님은 성령충만으로 사셨다. 밧모섬의 채석장은 ‘유배지’다. 나는 언젠가, 구속영장 청구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10시간 동안 갇힌 적이 있었다. 그 10시간은 내게 성령충만이었다.
세상과 멀어져야 하늘과 가까워진다. 불변의 진리다. 짜장면을 먹으면 짬뽕을 못 먹는다. 세상이 짜장면이면, 하늘은 짬뽕이다. 둘은 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마리 토끼 잡다가 본인이 잡힌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짜장면도 먹고 짬뽕도 먹는 것은 탐욕이다. 그러므로, 탐욕의 배를 줄이고, 주어진 여건에서 하늘을 섬기는 ‘밧모섬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가능하면, 스스로 밧모섬에 갇히는 경건의 훈련을 해야한다. 이것이 ‘심령의 촛대’를 유지하는 거룩한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