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두고,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틈새로 뱀이 들어온다. 구약성경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예수님이 읽은 정경은 토라다. 구약성경이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이 없었다. 구약성경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단들은 성경을 아는 것 같아도 너무 부분적으로 안다. 정통교회도 매 일반이다. 평신도가 성경을 깊게 연구한다면, 그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이며, 사도 바울의 제자 훈련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순회목사로서 11명의 제자와 여자 사도들과 120명의 제자 그룹을 양육했다.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2년동안 8명의 전문목회자를 길렀다. 그 8명이 바울의 성경해석을 상속받고, 후대를 양육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완벽히 통달했다. 바울이 그러했는데,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그러므로, 성경해석을 함에 있어서, 구약정경이 신약성경으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정확히 이해함으로, 이단들의 성경해석을 물리쳐야한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지혜롭게 보이지만, 십자가를 제거함이 목적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십자가의 열쇠’로 열고, 닫았다. 그것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왜,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외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까? 정답이 ‘십자가의 도’이니, 그러한 것이다. 자물쇠는 구약정경이요, 열쇠는 십자가다.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과연 그러한가” 연구하고, 탐구하고, 진리를 상고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것이다. 만약, 하와가 뱀의 성경해석을 듣고서, “과연 그러한가?”라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진리를 상고했다면, 뱀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되었을 것이다. 뱀의 말보다, 뱀의 말을 무조건 받아드린 하와의 책임이 크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유대 광야에서 뱀의 유혹을 받았다. 즉, 뱀의 성경해석을 들었다. 그때 주님은 성경원본 말씀을 통해 뱀을 물리쳤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그 사건을 마태복음 4장에 실었을까? 왜 마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바로 그 다음에 마귀의 시험을 실었을까? 마태의 편집의도는 무엇일까? 그 시대 정경을 생각하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겨냥하고,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창세기의 인봉’을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창세기 2장과 3장을 먼저 해석했을 것이다. 그 해석을 바탕해서, 마태는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마태복음 4장에 실었다. 그래서,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돕는 베필을 허락했다. 그때 하와와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택정을 받고, 곧바로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 첫 아담과 다르게, 마지막 아담은 마귀를 거절했다. 그렇다면, 선악나무가 무엇인가? 지혜나무가 무엇인가? 모두 같은 것이다. 마귀가 제안한 것이 바로 ‘지혜롭게 보이는 나무의 열매’인데, 경제와 능력과 지혜와 부귀영화와 권력이다. 그것으로 하와를 유혹하니, 넘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별개로 생각하면 안된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했을 때, 구약정경을 가지고 설교했다. 구약정경이 없다면 신약성경도 없다.
말씀을 상속했다는 것은 성경말씀의 원본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을 따라간 유대인은 말씀을 받지 못하고, 말씀없이 살았던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받은 이방인이 말씀없이 산다면, 그 결국이 어찌 되겠는가? 성령을 받은 이방인의 심령에 말씀이 기록된다. 성령은 말씀이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말씀의 상속자가 되어야한다. 말씀을 읽지도 않는데,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는 그 무엇이 ‘말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께서 말씀이 생각나게 하도록,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성경의 상속자’가 되어야한다. 나는 이단교회를 떠났는데, 그때 성경말씀속으로 들어갔다. 오!! 이 역설적 진실앞에 나는 십자가의 진리를 거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