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선악과(세속적 지혜)를 따먹으면 영생할 것이다”라고 하와는 판단했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은 판단했다. 결국, 어찌 되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주님은 성자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놓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성자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졌다. 그랬더니, 살인죄를 저지르고 민란을 꾸민 독립군 투사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에 메달렸다. 그날, 이삭에게 베풀어진 구사일생의 은혜는 없었다. 도리어, 바라바에게 특별사면이 허락됐다. 그리고 3일후,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했다. 이것이 영생이다. 십자가는 “죽으면, 살아난다”이다.
예수님은 부활후, 일곱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사람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일곱귀신에 들렸던 과거를 따지지 않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참회, 사랑, 열정을 보신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다.
마태복음 15:21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 이 루포가 훗날 전도됐다. 이방인들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 성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루포의 아버지 시몬은 ‘엉겹결’에 그러했다. 마태복음 5:41이 그대로 재현됐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五里)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十里)를 동행하고”
루포의 아버지 시몬은 예수님이 예수님인 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모르고 행했지만, 그것이 의(義)가 되었다.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마태복음 25:31 이하에 ‘양과 염소 비유’에서는 더욱 놀라운 진실이 드러난다. 주님은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다.
주님은 확실하게 ‘부활의 다른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막16:13) 육체가 영체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시고, 성도의 심령에 들어가시며, 그래서 믿는 형제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과 같다. 믿는 형제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일곱귀신에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엠마오로 낙향하는 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외쳤다. 그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그때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다. 형제가 외친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을 볼 것이 아니다. 사람속에 누가 말하느냐, 그것이 핵심이다.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군주 느부갓네살 왕은 식민지 포로 출신 10대 소년의 말을 듣고, 자신의 꿈을 해몽하고, 국가정책을 새롭게 개편했다. 곧, 다니엘이다. 루포의 아버지 시몬은 유월절 여행을 갔다가, 로마군인의 호출을 받고, 어떤 청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것인데, 그것이 그의 구원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헌신과 희생은 어떤 모습이든 아름답다. 루포의 아버지, 시몬은 예수님이 예수님인줄 모르고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다. 이것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