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로마서 통독’을 진행한다. 야호!! 이렇게 좋을수가!! 하루에 1장씩 읽기다. 오늘은 16일, 하루에 1장씩 읽으면 12월 31일은 16장, 1년을 로마서로 마친다. 오!! 보물창고 로마서!! 루터는 시편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깊은 영성’에 도달했고, 로마서를 읽으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을 받았다. 판결문보다 어렵던 로마서가 ‘강해설교’를 듣고서, ‘눈’(目)이 조금 열렸다. 한글도 배워야 알 듯, 로마서를 읽기 위해서는 성경문법을 배워야한다.
이단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다시 이단에 빠지거나,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무신론에 빠진다. 마치,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가 남한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월북하거나, 중국으로 가거나, 북한에 동조하는 활동을 하는 것과 같다. 남한의 자유를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이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남한은 개인의 자유가 허용된다. 이단에는 성경해석의 자유도 없고, 성령의 은혜도 없고, 십자가의 구원도 없다. 성경을 통해 그것을 발견하면, 이단에 돌아갈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영적 전쟁은 진리의 전쟁이다.
[롬1:25]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결국,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이다. 창세기 3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충돌했다. 그 중간지대에 사람이 있다.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창세기 3장을 읽을 때마다 “미친 하와!! 나쁜 아담!!”이라고 욕하지만, 인생은 현실세계에서 아담과 하와처럼 살아간다. 이것인 인간의 병폐다.
로마서 1장은 6가지 키워드가 극명한 대립을 이룬다.
1) 택정함 vs 내버림
2) 복음 vs 거짓
3) 부끄러워하지 않음 vs 부끄러움
바울은 복음으로 택정함을 받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해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둠을 당하고, 거짓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의 행위는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길, “하나님을 믿고, 행실이 부끄럽지 않고, 정의롭고, 진리를 추구한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림’을 당한 것이다.
[롬1:28]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喪失)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누구든지 마음에 ‘십자가’를 두기 싫어하면,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세상의 것들에 빠지게 하신다. 스스로 세상에 취해 사는 것이다. 십자가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게 하는 복음이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해서 50일째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있었다.
그처럼, 십자가의 피흘림을 믿는 성도에게 성령께서 거룩하게 함으로, 각 개인에게 때에 맞게 성령강림의 은혜가 임한다.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니, 마음에 하나님을 두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흘림은 곧 성령강림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이단교회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 로마서를 하루에 1장씩 읽고, 신앙칼럼을 꾸준히 써서, 내년 1월에는 ‘쉽게 읽는 로마서’ 책을 출간해야겠다. 누가창성(路加昌盛)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