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성경 66권의 압축이다. 로마서가 풀리면 모든 성경이 풀리고, 로마서가 막히면 모든 성경이 막힌다. 로마서가 성경을 푸는 열쇠다. ‘로마서 성경강해’를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솔직하게, “열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로마서가 막힌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로마서는 어렵고 난해하다. 로마서를 다룬 몇몇 신앙서적을 읽었는데, 더 어려웠다. 로마서보다 어려운 것이 로마서 신앙서적이다. ‘로마서 성경강해’는 내게 성경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성경강해 덕분에 로마서가 조금씩 이해가 된다. 덮였던 수건이 벗겨지듯이, 비밀스런 뜻이 드러난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취재를 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성경읽기와 드라마 보기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수레바퀴 삶’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NO”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은 부끄럽지 않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둠을 당하고, 자신들의 양심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들을 자신이 해야할 감옥에 갇힌다. 물이 넘쳐 홍수심판을 당하듯, 자유가 넘쳐 자유심판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왜 성경을 읽어요?”
내게 누군가 물을 것이다. “왜 교회에 다녀요?”라는 말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왜 다른 나라 지도자를 믿어요?”라는 물음도 같은 맥락이다.
“그럼, 왜 성경을 안 읽어요? 왜 교회에 안 다녀요? 왜 천국에 가길 원하지 않아요?”
나의 반문이다.
나는 성경을 “베개”로 삼듯, 날마다 성경으로 살아간다. 뭘 해도, 성경이 앞선다. 성경 또는 신앙서적이다. 나는 신학(神學)을 전공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성경을 전공한다. 한글로 씌였고, 성경을 연구한 수많은 저서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경을 알고자 한다면, 알 수 있다. 성경을 처음 읽을 때는 몹시 어려웠다.
그런데, 하루에 1장씩 꾸준히 하다보니, 성경이 내게 깊은 영감을 주고, 내 마음의 우울증도 다스려주고, 제비처럼 내게 즐거운 생각과 좋은 일을 있게 했다. 성경을 읽으면, 마음이 맑아진다. 그것이 제일 좋다. 성경속에 슬픈 일이 있다. 그런 사건을 읽어도 마음은 맑아진다.
진 에드워드는 신약성경을 집필된 순서대로 재배치할 것을 주장했다. 어떤 부분에서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작성배경을 생각하면,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가 오는 것이 합당하다. 단지, 로마제국의 권위 때문에 로마서가 먼저 온 것이 아니다. 바울서신에 있어서, 로마서가 모든 서신을 대표해서 그렇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처녀작이다.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의 증보판이다. 갈라디아서 6장이 로마서의 16장으로 확장된다.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는 시점에, 바울의 동역자 40명이 로마로 파송되고, 그들과 그들이 전도한 이방인 신도들에게 쓴 바울의 마지막 신학논문이다.
로마서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매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며, 또한 로마인이다. 로마인으로서 이방인, 신앙인으로 유대인, 바울의 정체성이다. 그는 율법에 정통했고,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바울은 율법을 재해석하면서, 구원의 깊은 도를 깨닫게 되었다. 로마서가 풀리면, 성경의 깊은 도가 뚫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