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심판에서 내보내셨다. 롯의 행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롯을 구원한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구원을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면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의인 10명의 기준선까지 중보기도를 했다. 롯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에 달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아브라함의 조카’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한다. 최후심판에서 우리가 믿을 분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천사들이 롯을 직접 찾아가서, 롯이 천사들을 영접하면서, 롯의 착한 행실이 구원을 받게 한 것처럼 묘사된다. 전혀 아니다. 롯은 손님들을 위해서 두 딸을 동네 청년들에게 주려고 했다. 두 딸은 유부녀인데도 그렇게 했다. 이것은 상식밖의 일이다.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면, 롯이 착한 행실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누가 처음 만난 이방인을 위해 자신의 귀한 딸을 버릴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버리고,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의”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다.
로마서 1~3장까지 이방인과 유대인이 나온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할례를 받은 민족인데, 구원이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정면돌파했다. 할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시작점’을 거론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제 의롭다고 여겨졌는가? 창세기 15장이다.
창세기 15:6이 로마서 4장에서 계속 인용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되어있다. 바울은 단어 2개를 살짝 바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그의 의(義)가 그에게 의(義)로 바뀌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문맥상 ‘아브라함’의 동일인을 표시한 것이고, ‘그의 의’가 ‘그에게 의’로 바뀐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의 의’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의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의’라고 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의롭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이 있어서, “의롭다”고 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에게 부어졌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다. 본래 빛이 없었고,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이 빛이 되었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다. 의(義)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
그러면, 이신칭의를 받으면, 인간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인간의 죄는 소멸되고, 구원이 확정된다. 그렇다면, 죄는 어떠한가? 하나님앞에 인간은 영원히 죄인이다. 의인일 수가 없다. 하나님앞에 인간은 영원히 죄인이므로, 십자가로서 의인이 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앞에 날마다 죄인이다. 죄인이므로 의인이다. 스스로 “나는 의인이다”고 하는 순간, 율법적 도덕률이 칡넝쿨처럼 감아올릴 수 있다. 십자가를 믿는 그것이 ‘행위의 표지’가 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자부심이 ‘할례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구원의 근원은 “십자가”다. 그것을 잊으면 안된다. 구원파가 위험한 것은 “구원”을 “행위”로 확정해서 그렇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 연결됨으로 영원히 확정되는 것이지, 십자가를 떠나서 스스로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날마다 “죄인됨”을 고백하면, 주님은 “의로움”을 부어주신다. 반면,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날마다 “의로움”을 고백하면, 주님은 부어줄 “의로움”이 없다. 스스로 의로움이 가득한데, 어찌 주님의 의가 부어질 수 있는가? 내면의 그릇에 있는 그 의로움이 ‘누구의 의’인가? 그리스도의 의(義)를 인정하는 자마다 자신의 죄가 각인된다. 우리가 자각하는 모든 죄(罪)는 구원의 확증이다. 그러므로, 곰처럼 십자가의 구원을 날마다 울부짖고, 기뻐하라!! 주님은 그러한 기도를 즐겨 받으신다.
[이사야 59: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시편 51:3~4]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성령을 의지하는 자들은 항상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상달되어 “의로움”으로 전가된다. 반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내 의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자랑하므로, 하나님의 의와 멀어진다. 자기행위를 의지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워진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 자기 의는 곧 ‘죄’(罪)다. 자기 의(義)가 하나님의 의(義)를 가리게 하니, 자기 의(義)가 죄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義)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의(義)가 의로움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인인가? 의인인가?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죄인이다. 그 죄인됨이 십자가를 통해서 ‘의로움’으로 확정됐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다. 밀가루는 영원히 밀가루다. 그런데,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옴으로 그 밀가루에 ‘칭의’로서 변화가 일어난다.
* 루터의 로마서 주석(CH북스) p1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