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장에는 첫아담과 마지막 아담 이야기가 나온다. 확실히, 바울은 “아담”을 인류의 조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 시대 과학문명 수준으로 “진화론”과 “우주창조”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첫아담을 종교적 조상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죄(罪)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심령으로 자복하지 않으면, 대속적 그리스도가 ‘이웃나라 역사’로 느껴진다. 네이버 뉴스에 보면, 요즘도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했고, 총기사고가 났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가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다를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로마서 1장, 2장, 3장에 열거된 각종 불의와 죄때문에 ‘대속하기 위한 화목제물’로서 발생했다. ‘불의와 죄’속에 우리도 포함된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반대했다. “의롭다”는 전제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깨달았으니, 자신은 의롭다는 전제가 바탕되고, 불의한 죄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 이유는 타당하다. 이성계의 4대 불가론처럼, 사도 바울은 ①볼품없고(연약) ②불경스럽고(불경건) ③죽을 죄를 짓고(죄인) ④멸망받아 마땅한 존재(원수)를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다고 천명한다.
“십자가의 4대 불가론”으로 사람의 존재는 먼지같고, 불의하고,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다. 그런데, 주님은 죽으셨다. 그 죽음이 사랑의 확증이다. 내 마음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죄악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각종 불의와 번뇌와 탐심이 넘쳐난다. 여전히 불의한 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구원을 위해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십자가의 4대 불가론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했지만, 주님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5:20에 놀라운 말씀이 나온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해병대에 입대했을 때, 군율이 선포되니, 사회에서 행했던 모든 것이 ‘불의’였다. 사회에서 하듯 하면, ‘불법’이며, ‘범죄’였다. 언어부터 달랐다. 사회의 것들은 모두 썩어 없어질 것들에 불과했다. 2년을 버텼더니, 해병대에 적응했다. 전역하니, 군대에서 익혔던 모든 것이 불의했다. 1년 넘게 힘들었다. 적응하니, 제법 사회인이 되었다.
율법이 온 것은 ‘범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내면에 율법의 등불을 켜면, 로마서 1장에 나온 죄악의 소굴이 박쥐처럼 숨어있다. 행위의 죄를 짓든, 짓지 않든, 모두 ‘잠재적 죄인’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노라!! 그 죄악의 소굴을 그리스도의 반석으로 막아야한다. 그 반석위에 생명의 교회가 세워진다. 사람의 겉은 차별과 등급이 각각이어도, 내면의 속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 본질이 죄다. 흙에서 왔고, 아담의 속성이 내재돼서 그렇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람창조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