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8에 보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의의 종이다. 율법은 ‘죄의 종’을 만들고, 은헤는 ‘의의 종’을 만든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이다. 이단종교 성경공부에서 교육하는 종급-아들급-신부급 이론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진화론적 차원성을 말하지만, 성경적 진리는 그렇지 않다. 죄의 종이 의의 종으로 변화된다. 또한, 죄의 아들이 의의 아들로 변화된다. 죄의 신부가 의의 신부로 변화된다.
죄의 아들이 탕자다. 탕자가 돌아와서 아들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죄의 신부는 곧 음녀다. 고멜은 호세아의 신부였으나, 다른 남자를 만나서 ‘죄의 신부’가 되었다. 호세아가 그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왔다. 고멜은 ‘죄의 신부’에서 ‘의의 신부’로 회복된다. 종-아들-신부로 차원성 변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와 의’의 명확한 구분이다.
종(從)은 옛날 한자로 从으로 썼다. 쌍시옷이다. 사람을 바짝 붙어서 그림자처럼 졸졸졸 따라가는 것이 ‘从’이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그림자로 살아가고,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의 그림자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성령께서 마음속에 들어가서, 의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義)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의(義)도 된다. 성령께서 계시면, 하나님이 믿어진다. 그 믿음이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 스스로 만들 수 없다. 사람이 만든 믿음은 하나님을 향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신부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나, 모두 같다. 무엇이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다. ‘높고 낮음’을 판단하면, 그것은 세상적 기준이다. 아가서에도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했다. 친밀감과 사랑과 충성은 모두 함께 발생하는 감정의 산물이지, 나눠질 수가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기까지 ‘종’처럼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며,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신부가 모두 주님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신부된 교회라고 불렀고, 주님은 교회의 머리요, 남편이다. 신랑 신부,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각각 성도들에게 맞게 이해되도록 비유된 것이지, “너는 종, 너는 아들, 너는 신부”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면서, 신부가 될 수 있고, 오늘은 종이면서 내일은 신부로 살 수 있다. 신분은 하나님안에서 자유하다.
인생은 죄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바울은 놀라운 선포를 한다. 인생은 죄에 대해서 죽었다. 그 필요조건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었으니, 주님과 연합한 자는 죄에 대해 죽고 장사(葬事)된다. 죄가 죽었으니, 죄는 살아날 수 없다. 우리몸에 있는 모든 죄는 박멸됐다. 단지, 죄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죄의 뿌리는 발본색원(拔本塞源)되었고, 적폐청산(積幣淸算)되었다. 가끔, 죄가 올라오면, 그것은 밤중에 원수가 뿌린 가라지 씨앗일 것이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은 영생한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안에서 영생한다. 아멘!!
큰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총동문회장이 먼저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그때, 총동문회장이 말하길, “선불로 계산했으니, 나갈 때 ‘순천고등학교’ 이름을 말하면 된다”라고 했다. 순천고등학교 이름만 말하면 된다. 그러면, 밥값을 따로 계산할 이유가 없다. 죄의 옥문이 열리는 이유는 ‘자물쇠 비밀번호’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죄의 자물쇠는 ‘하나님의 의’로서 열린다. 그것이 아니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선불로 계산한 것이 ‘십자가의 은혜’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단계 칭의론”을 말한다. 살아서 구원을 받은 것은 ‘임시적 약속’이고, 죽어서 행함의 심판을 받고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단계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주님께서 이미 선불카드로 결재했다. 그 이름을 믿으면, 죄의 자물쇠가 열리고, 죄의 밥값이 계산된다. 죄의 감옥에서 벗어났는데, 더 이상 죄값에 대한 심판은 없다. 의의 종으로서, 의의 아들로서, 의의 신부로서 공적의 평가대회만 있을 뿐이다.
연말에는 항상 송년회를 하고, 회원들의 행함에 대한 시상식이 있다. 연말에 ‘회원 박탈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연초에 회원은 연말에도 회원이다. 살아서 구원은 죽어서도 구원이다. 예수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활하셔도 예수님이다. 주님과 연합한 우리도 동일하다. 이단계 칭의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그들에게 해당될 뿐, 주님의 약속은 한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로 약속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연말 시상식처럼 죽음의 끝에서 믿는 성도들을 위해 ‘행함의 공적 시상식’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