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인류가운데 남겼다. 만약, 그들이 이집트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400년 노예생활을 할 때, ‘율법의 말씀’은 없었다. 그곳을 떠났을 때, ‘뱅뱅뱅’ 맴돌고, 사막을 횡당하고, 전쟁과 갈증과 방황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의 혈투’였다.
인생도 동일하다. 나는 30년 동안 ‘꿈의 신흥종교’에 있었으나, 똑같은 교리를 주입식으로 계속 반복하고, 외우고, 앵무새처럼 세뇌하고, 그렇게 살다가, 지난해 자유의 날개를 달고, “광야”를 향해 “무릎”을 펴고, 걸었다. 신앙의 직립보행은 ‘자유의지’다. 1년동안, 성경책과 씨름하고, 나를 이끌어주신 목회자의 인도를 따라, 사막을 횡당하듯, 두려움과 공포를 ‘평안의 손길’로 건넜다.
계시록에 보면, 사데교회가 나온다. 죽을 사(死)를 연상킨다. 그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판단받았다. 사데교회는 마귀들도 관심이 없다. 왜냐면,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마귀들이 ‘비진리’로 공격한다. 사데교회는 외부의 공격이 전혀 없고, 스스로 망했다. 풍요가 가져온 자멸이다. 사데교회는 매우 잘살고, 아무 문제가 없다보니, 하나님을 향한 ‘상한 심령’도 없다. 진리를 갈구하는 간절함도 없다. 이단은 진리를 추구하다가, 한쪽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변질된다. 이단은 옳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옳다. 사데교회는 진리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교회다. 생명력이 상실했다.
구원은 누구로부터 말미암고, 영생은 어디서 흘러나오는가? 교회와 그 제도에 영혼이 매몰되면 안된다. 전통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신흥종교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이 확증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의 은혜다.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 상한 심령으로 기도해야한다.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평안한 그 상태는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다.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보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다. 세상이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고, 명성도 있고, 평안함을 누리고 있으나, 하나님이 보기에 “죽은 자”가 사데교회다. “행위의 온전함”이 예배출석이나 찬양이 아니다. 상한 심령으로 주님께 낮아져서, 첫사랑을 회복해야한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붙드는 간절함 심령이, 그 떨림이, 그 두려움이, 그 환란이, 마음에 떨어지면서, 부활의 구원이 확증되는 것이다. 사데교회에 흰 옷을 입은 몇몇이 있는데, 그 흰옷은 ‘피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