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했다. 누가 이길까? 토끼가 아니고 거북이다. 몇가지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거북이가 승리한다. 토끼는 교만해서 ‘낮잠’의 자만에 빠졌다가 낭패를 당했다. ‘낮잠’이 곧 넘어짐의 앞잪이다. 오수(午睡)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 토끼는 잠을 자야했을까?
로마서 11장을 읽을 때, 나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가 생각났다. 유대인만 하나님을 믿었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 “구원이 이방인에 이르렀다”는 뜻은 “바로의 후손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 곧, 홍해에 빠져죽은 바로의 후손이 건져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롬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토끼의 낮잠이 거북이의 속도가 되었다. 이런 경우는 야구경기에서 자주 나타난다. 야구는 실수가 실력이다. 야구에서 실수는 곧 실점(失點)이니, 실수가 곧 실력을 증명한다. 실수가 없는 것이 야구실력이다. 실수하면, 상대의 실력으로 이어진다. “실수가 실력이다”는 뜻은 “나의 실수가 상대의 실력이다”는 의미다. 유대인의 실수가 곧 이방인의 실력이 되었다. 장애물 경주에서 넘어지면, 순위가 바뀐다.
구원의 경주에서 2명이 뛰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유대인은 장애물에서 넘어졌고, 이방인은 그때까지 출발하지도 않았다. 놀고 있었다. 구원의 경주가 있는 줄도 몰랐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거북이는 출발했는데, 구원의 경주에서는 ‘이방인’이 구원의 경주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런데, 출발만 하면 승리한다. 유대인들이 넘어졌기 때문이다. “넘어졌다”는 것은 구원의 경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마치, 토끼가 잠을 잔 것과 같다. “토끼가 잠을 잤다”는 것은 경주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구원의 경주가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답을 맞출 우선권이 있는 팀에서 정답을 맞추지 못하면, 기회가 다른 팀에 넘어간다)
11장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온다. 엘리야 하면 아합왕이 떠오른다. 모세는 ‘바로왕’이고, 엘리야는 ‘아합왕’이다. 모세의 후예인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에서 배제됐다. 바로의 후예인 이방인은 구원을 받았다. 아합의 후예인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았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임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명”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민족 이스라엘이 아니다. 바울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정의했다. 칠천명 중에 ‘사르밧 과부’도 포함될 것이다. 엘리야를 공궤한 까마귀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이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중에는 이방인도 포함된다. 이 시대도 “맘몬신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와 “권력신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남겨두셨다. 그들이 “참 이스라엘 백성”이다.
인생의 재능이 토끼처럼 월등히 빨라도, 그 방향이 반대라면,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율법의 의로움’은 ‘자기 행위의 의’로서, 의(義)는 하나님의 고유 브랜드다. 돈은 한국은행에서만 만들 수 있다. 의(義)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의(義)가 구원을 이룬다. 세상적 의(義)는 대통령이 주는 무궁화 훈장일지라도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다. 구원의 방향은 “하나님의 의”가 있는 믿음이고, 멸망의 방향은 “자기 의”가 있는 행동이다. 행위로서 구원은 절대 이루지 못한다.
“믿음”으로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때” 구원이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밤새 동풍으로 행동하실 때 홍해가 갈라졌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라”고 말씀하셨을 때, 홍해가 완벽히 갈라지면서 물속의 뭍이 드러났다. 모세가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표적의 창조자는 오직 하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