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영적 예배니라”
– 롬12:1
세속(世俗)을 떠나, 산에서 사는 종교는 불교다. 몸이 세속을 떠날지라도 마음은 세속에 남아있어, 번뇌(煩惱)가 생긴다. 바울은 “살아있는 몸”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라고 권면한다. 제물(祭物)은 반으로 쪼개야한다. 그처럼, “사람의 마음”을 쪼개야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한다. 바울은 분별의 3가지 기준을 말한다. ①선함 ②기뻐함 ③온전함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한다.
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의 문장이 와 닿는다. 바울은 “이 세대를 거부하고, 멀리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 세대속에 살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분별(分別)하려면, 그것을 듣고 보고 확인해야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소굴’ 유대광야에 가서 그들의 소리를 듣고 분별했다. 누가복음에서는 마귀가 얼마동안 떠났다고 기록된다. 마귀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다가, 나사렛에서 ‘메시야 선포식’을 하셨다. 그곳에서 영적 대전쟁이 있었다. 예수님은 “마귀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복음을 외쳤다. 갈릴리,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과 직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어디든지 가셨다. 산 제물이 된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로마제국 한 복판에서 외쳤다.
바울과 예수님과 루터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루터는 바울사상을 중심해서 예수님을 믿고, 재해석했으니, 바울과 예수님의 핵심적 공통점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성육신한 하나님이고, 바울은 그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을 전했으니, 대등적 관계로서 ‘공통점’을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역”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공동체”다. 예수님과 바울은 모두 “교회”를 낳았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본토에서 “제자 공동체”를 낳았고, 바울은 이방땅에서 “초대교회”를 낳았다.
예수님과 바울의 공동체가 교회인데, 기존에 있던 공동체들과 완전히 다르다. 기존에 있는 공동체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정치적 공동체, 종교적 공동체이다. 로마제국이 정치 공동체이며, 군림하는 집단이고, 행정체계로서 관료주의다. 유대교가 종교 공동체이며, 역시 세습체제로서 군림하는 집단이고, 계급사회였으며, 군림하는 관료주의였다.
기존에 있던 공동체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과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였다. ‘성도와 성령’의 소통이 없었다. 특히, 유대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성전을 중심으로 성도들의 신앙과 영혼을 구속했다. 로마서 12:3~20은 로마제국 속에 있는 교회공동체가 성도들끼리 어떻게 살아갈지 알려주고 있다. 그 교회공동체가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어서, “죽어있는 정치공동체”를 이긴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다. (롬12:5) 과연 그러한가? 예수님과 바울이 낳은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됨으로 살아있는 공동체였다. 살아있는 공동체가 곧 ‘신부된 교회’이다.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그런 공동체가 교회다. ‘십자가의 거룩한 피’가 교회의 몸에 흐를 때, 교회는 살아있다. 교회가 과연 그러한가? 교회가 커질수록 집단화가 되면서, 나무토막처럼 성도와 성도의 소통이 단절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은 5천명이 모인 들판에서 50명씩, 100명씩 소그룹을 지어서 나누었을까?
** 살아있는 교회는 각각 성도가 성령과 소통하고, 성령을 받은 성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성령의 연합’이 곧 살아있는 교회의 표준이다. 거대한 집단주의로 교회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헤롯성전에 매몰된 ‘유대교의 최후’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한다. 성령으로 살아있는 성도들의 연합이 ‘성령의 연합’이다. 각각 사람이 성령을 받지 못하면, 집단적으로 성령은 임하지 않는다. ‘집단적 성령’은 ‘군림하는 짐승의 권력’이며, ‘율법적 제도’에 불과하다. 성령은 집단주의를 배척하며, 각 사람의 심령가운데, 인격체로서 1:1로 사랑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