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보혜사”는 누구일까? 그는 “진리의 성령”이다. “또 다른”은 “예수님”과 비교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뜻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보혜사’였다.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담임교사가 학교를 떠나니, 학생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나듯 비슷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담임교사였다. “또 다른 담임교사”가 올 것이니, 제자들에게 걱정마라고 했다.
성경말씀은 진리다. 거짓이 없다. 또 다른 보혜사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고, “예수님의 영광”을 구할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역사적 예수’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는데, 왜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구할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는 성령은 곧 ‘예수성령’이다. 성육신한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부활의 예수님이 곧 ‘예수성령’이다. “또 다른 담임교사”는 곧 담임교사 본인을 뜻한다. 그런데, “다른 모습”으로 온 것이다. 교육청 장학관으로 들어간 그 담임교사는 다시 그 학교의 교장이 되어서 학생들과 재회했다. 학생들을 사랑해서, 학교 전체의 담임교사가 된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6)
예수님의 영혼이 아니면, 예수님의 심령을 알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로서 성육신한 그 ‘예수님의 영혼’이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그가 곧 진리의 성령이다. ‘예수성령’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구분하는 이유는 ‘성육신과 부활의 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서” 제자들과 함께 했다. 다른 모양의 예수님이 바로 “또 다른 보혜사”이다.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16:12)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21:4)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던 일곱제자들을 보고 있던 해변의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인줄 전혀 몰랐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눈앞의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듯 그렇다. ‘전혀 다른 모습’은 헤르몬산의 변모사건처럼 얼굴과 용모가 완벽히 다른 모습이 된다. 변모되신 예수님이 곧 역사적 예수님이다.
헤르몬산에 올라갈 때 그 예수님과 내려올 때 예수님이 동일했다. 모리아산에 올라갈 때 이삭과 내려올 때 이삭이 동일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살아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일하다. 하나님께 올라가신 예수님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동일하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곧 ‘부활의 예수님’이다.
“그들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 “또 다른 보혜사”에서 “다른”은 헬라어로 ‘알로스’다. ‘알로스’는 ‘전혀 같음’, ‘똑같은 종류의 다른 하나’를 뜻한다.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같은 보혜사로서, 예수님 자신의 ‘부활한 영체’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