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2:1~3
오늘도 하루가 금방 흘렀다. 서울교육방송 상표권 2심 소송때문에 하루종일 답변서를 쓰다보니,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하루가 흘러갔다. 로마서를 읽고, 히브리서를 읽어보니, 힙 2:1에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확” 느껴졌다. 세상 일에 빠지니, 복음이 금방 마음 밖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인간이다. 심령을 유심히 살펴야한다.
히브리서 1:1에서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모든 날 마지막”은 종말이다. 인생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육체는 없다. 집은 이사하지 않아도, 영혼은 ‘마지막 이사’를 해야한다. 그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하루의 마지막을 “인생의 종말”로 맞이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부고장”을 각 사람에게 보낸다. 인생이 부유하게 살다가, “큰 구원”을 등한시 할 수 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옛뱀’은 ‘문명의 나무’뒤에 숨어있다. 십자가에서 머리가 짓뭉개진 옛뱀은 전술을 바꿔서, ‘복음’을 오해하게 하면서, ‘복음’의 가치를 낮게 여기게 하면서, ‘더 좋은 즐거움’을 주면서 ‘구원’을 등한시 하게 한다.
성도들은 “들은 것”에 유념해야한다. 유념하지 않으면 “들은 것”을 뺏긴다. 말씀은 밭에 떨어지는데, 새가 쪼아 먹으면, 복음의 씨가 없어진다. 새가 누구일까? 우리가 즐겁게 놀면서 기뻐하는 ‘오락’이 그것일 수 있다. 복음을 등한시 하는 모든 것이 ‘나쁜 새’요, ‘문명의 뱀’이다. 복음이 심령에 가득차면, 성령께서 문명을 다스리게 하며, 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각자, 마음속에 ‘복음’이 태양처럼 빛나는가?
오늘 하루동안, 서울교육방송 상표권 소송에 신경쓰다보니, 성경말씀이 읽혀지지 않았다. 마음이 파도치듯 불안해지고, 온통 소송에만 몰입했다. 물론, 서울교육방송을 위한 일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세상 일에 마음이 쓰이니, 복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나님을 믿으라!!”는 그 말씀으로 내가 살았는가? 스스로 자문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진실하다. 날마다 자신에게 “부고장”을 보내야한다. 종말에 서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무덤에 내려가는 자로서 ‘잠’을 청해야한다. 과연, 내일 일어날 수 있는가? 이 땅의 향락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뿌리째 마른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한 것을…… 나는 나를 장례지내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종말의 구원”을 문신처럼 새기는 것이다.
히브리서 2:3에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했다.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았다면, 가보(家寶)로 여길 것이다. 나는 노트북이 ‘보물 1호’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 “큰 구원”을 “국보 1호”로 선포한다. 이렇게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되겠는가?
‘등한히’는 ‘등한시’(等閑視)와 같다. 무리 등(等) 한가할 한(閑) 볼 시(視)다. ‘모든 무리가 한가하게 쉬면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평온함’이 아니다. 군인들이 보초를 전혀 서지 않고, 모두 놀고 있으니, 적군이 쳐들어올 것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달려온다. 큰 구원을 뺏기 위해서 마귀는 호시탐탐 인생을 노린다.
큰 구원에 대해 ‘놀면서 소홀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등한히 여기는 것은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 ‘주식투자’하듯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듯이, 드라마 보듯이, 사랑하는 애인 만나듯이, 설레임으로 그리움으로 주 예수를 사모하는가? 그 마음이 없다면,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는 것이다.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멍청한 에서처럼 단팥죽 한 그릇에 복음의 장자권을 뺏길 수도 있다. 유념하라!! 내게 성경지식이 넘쳐날지라도, 성령이 내 심령에 없다면, 그 지식이 무슨 소용이랴!!
그러므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