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큰 범주로 두 개의 종교다. 하나는 기독교요, 나머지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다. 기독교는 믿음종교요, 나머지는 ‘도덕과 율법’ 종교다. 율법은 곧 계명이다. 계명을 지키면, 도덕적 행위가 쿠폰처럼 쌓여서 선행으로 좋은 곳에 간다는 이론인데, 이러한 종교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적 의로움은 연말 시상식에만 유용할 뿐, 죽음 너머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죽음 너머의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직할권한이다. 강 건너편에 계신 창조주께서 배를 타고 건너오셨으니,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예수님’이다.
“미래에서 어찌 창조주가 오실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창조주가 어찌 보일 수 있는가?”
창조주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니 능히 들어올 수 있다. 육신을 가진 자가 유체이탈을 함으로 황홀경(영적 체험)을 경험하듯이,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할 수 있다. 우주(宇宙)는 공간과 시간의 집이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설정한 좌표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하신다. 보이지 않는 커텐을 잠시 열고 이 땅에 오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33년을 사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휘장의 커텐’을 찢고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구원을 창조했다. 구원은 곧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이다.
의(義)와 관련해, 이사야의 예언이 참으로 놀랍다. 이사야 55장에 보면,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했다. 악인이 하나님께 가면, 용서를 받는다. 악인이 악을 버림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악인은 “악”을 스스로 버릴 수 없다. 악인은 악인인데, 하나님께로 가면 긍휼과 용서를 너그럽게 받는다. 탕자는 창녀와 놀아났지만, 고향집으로 낙향함으로 아버지의 환대를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도덕적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이사야는 외친다. 그때가 언제인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이며, 인간이 죄를 인정하고 구원주 예수님을 바라볼 때이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움에 취하면, 하나님이 멀리 느껴진다. 의(義)를 기준하면, 하나님은 하늘이요, 사람은 지하세계다. 반면, 죄(罪)를 기준하면 인간은 본성이 죄(罪)요, 주님은 죄를 용서하는 구원주이니, 천생연분이다. 인간과 하나님은 짝이다. 죄인된 인간과 의인된 하나님은 하늘과 땅처럼 어울린다.
하나님의 구원은 “값”으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편의점에서 물건값을 지불하듯이, 구원에 대해 값을 지불하려고 스스로 “의”를 쌓는다면, 그것이 ‘악인의 길이요, 불의한 길’에 해당된다. 그래서, 스스로 의를 쌓는 그 길을 ‘악한 길, 불의한 길’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사야 55장 1절에서, 이사야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다. 구원과 영생은 돈없이, 값없이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긍휼을 베푸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해당 문장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로 의역될 수 있다.
모세가 긴 막대기에 ‘불뱀’을 메달았다. 구리뱀을 보는 자마다 구원을 받았다. 구리뱀을 죽인 장대는 복되도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복되도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와 긍휼이 여김을 받는 자들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니, 불의하고 악한 인간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긍휼을 베푼 그것을 조건댓가로 긍휼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 구원을 상속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