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장을 암기하는 것은 참 좋다. 49세, 팔복장을 외웠다. 반복해서 읽다보니 알게됐다. 십계명은 “해야만한다”의 의무사항이고, 팔복장은 “축복과 기쁨”이다. 율법종교와 은혜종교는 마태복음 5장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옛날에는 왜, 몰랐을까? 게다가, 나머지 2개는 제자들의 축복이다. 아홉 번째에서 “너희”가 등장하면서, 박해받는 제자들의 상급이 나오고, 열 번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 나온다. 아홉 번째와 열 번째는 별도로 외워야한다. 독립선언문을 암기하듯, 제자 공동체는 5장과 6장과 7장을 모두 암송했다.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에서 “입”은 예수님의 입술이며, 또한 제자들의 입술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입술을 열어서, 그들이 입으로 암송할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이다. 주입식 교육처럼 율법의 어떠함을 지식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고, 5장과 6장과 7장을 통째로 암송해서, 새언약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돌에 새겼지만, 주님의 새언약은 사람의 입술과 마음에 새겼다. 암송은 말씀의 성육신이다. (군대용어로 복명복창이 있다. 주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이 함께 따라하면서, 주님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상속하셨다.)
팔복장의 8개 문장은 모두 A+B로 되어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A),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B)
어쩌면, A는 예수님이 말씀하고, B는 제자들이 대답하듯 말하면서 이 말씀을 암송했을 수도 있다. 두 명이 함께 짝을 이뤄서 입술로 암송하기에 좋게 되어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마태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입술에 정확히 상속시키셨다. 성령께서 혀에 말을 주듯이, 예수님이 산상수훈 말씀을 제자들에게 물려줬고, 마태는 나중에 전도되었지만, 제자들을 통해서 그것을 배워서 익힌 것이다. (마태는 9장에서 전도됨)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먼저, 이 이미지를 외워야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가는 장면과 똑같다. 출애굽기 25:12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했다. 그때 여호수아만 모세를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주님은 산꼭대기 올라서 앉아, 제자들의 입술을 ‘말씀의 그릇’으로 삼고, 새언약을 받아서 전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을 입술로 읇고, 행위로 말씀을 실천해야한다.
팔복장을 외우려면, 앞의 단어를 4개씩 외워야한다. 심령-애통-온유-의, 긍휼-마음-화평-의. 이것만 보더라도, 평행 댓구법이다. 앞의 4개가 차례대로 뒤의 4개로 이어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 : 긍휼히 여기는 자
애통하는 자 : 마음이 청결한 자
온유한 자 : 화평하게 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주의할 단어가 있다. ‘박해를 받은 자’이다. ‘박해를 받는 자’가 아니고, 과거형이다. 팔복장은 모두 ‘현재상태와 지금’을 뜻하는데, ‘박해’와 관련해서는 ‘과거형’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각각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이고, 나머지는 “그들이 어떠하다”로 끝난다. 이제, 암기하면 외워진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곧 예수님이다. 마음이 청결하면, 창문이 환하게 비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주님의 얼굴이 하나님과 동일하다. 보이는 얼굴과 내면의 얼굴, 인격과 사랑의 얼굴이 모두 동일하다.
** 심령-애통-온유-의, 긍휼-마음-화평-의.
이것을 외워야만, 팔복장이 쉽게 외워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외울 때, ‘목마른’의 이미지에서 ‘긍휼’을 연상하면 자연스럽게 5번째 지복이 연결된다.
** 산에 올라가서 앉았을 때, 제자들이 나아왔고, 무리는 오지 못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입술로 암송하면서 묵상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산에 있는 것과 같다. 말씀은 곧 주님이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산기슭에 있는 무리다. 모세때도 백성들은 산기슭까지만 오르고, 산을 오르지 못했다. 8장에서 산에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서, “그들”은 누구일까? 팔복장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애통하는 자는 무엇 때문에 애통했을까? 누구를 위해 애통했을까? 나의 어머니는 자식인 나를 위해 날마다 애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인생에 위로가 되었다. 주님의 애통함이 제자 공동체에 평강이 되었다. 애통하는 자는 ‘그들’을 위해 애통했고, 그 눈물이 중보기도가 되어서 그들이 위로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그 이름을 부르면서, 자주 하나님께 기도한다.
“나사로야! 나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