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救援)은 건져서 당긴다는 뜻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의 늪’이 있다. 그곳에 빠지면, 쉽게 헤어날 수가 없다. 어려울 난(難)은 진흙과 새의 합성이다. 새가 진흙에 빠지면, 날개짓을 할수록 늪에 빠진다. 사람이 진흙속에 들어가서, 새를 들어올려, 꺼내와서 새를 씻길 때, 자유의 하늘로 다시 날 수 있다. 육신이 살아가는 대부분 고난은 사람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불가능한 고난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또한 해결방법은 이론적으로 나와있다. 그렇다면, 왜 구원이 필요한가?
구원은 영어로 redemption이다. 1994년 개봉한 ‘쇼생크 탈출’의 영어제목이 “The Shawshank Redemption”이다. ‘쇼생크 감옥에서 탈출’이다. 탈출은 곧 구원이다. 구원에는 ‘구원주’가 있고, ‘피구원자’가 있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존재하고, ‘구원의 방법’이 있다. 이것이 구원의 4가지 조건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감옥에 갇혔고, 억울한 누명을 썼다. 주인공의 구원주가 될 간수가 꺼내주지 않자,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았다. 지질학적 방법을 동원해서 감옥의 벽을 파서, 탈출에 성공했다. 구원주는 ‘자신’이요, 피구원자도 ‘자신’이요, 구원의 방법은 ‘숟갈로 파기’이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은 ‘감옥’이다. 그렇다면, 그 주인공은 영생을 얻었는가? 영화의 끝장면에서 감옥의 동료를 만났으나, 그것이 과연 영생의 면류관일까?
구원주는 ‘구원투수’로 비유된다. 구원투수가 필요한 이유는 구원받을 상황,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 주자가 출루했고, 타석에 4번타자가 나왔다. 그때, 구원투수가 등장해서 병살타를 유인해서 상황을 종료한다. 구원주는 ‘구원투수’요, 피구원자는 ‘야구팀’이요, 구원받을 상태는 ‘만루 상황’이며, 구원의 방법은 ‘병살타’이다. 그 야구팀은 위험을 넘기고, 승리했다. 이제, 그 야구팀에 영생이 왔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다. 그 기쁨은 역사교과서와 TV를 통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적으로 시청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에게 ‘영생의 구원’이 임했는가? 어떤 대통령이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을까? 누구도 못한다. 영생은 이 땅의 구원이 아니라서 그렇다. 구원(救援)의 단어가 인간의 언어인데, 근본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 성경적 ‘구원’(救援)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원의 개념과 성경적 구원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나는 이혼했다. 그래서, 나는 재혼을 꿈꾼다.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게는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나의 구원’이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근원적인 구원은 다른 데 있다. 물론, 하나님은 내 인생의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키시고, 이혼을 재혼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믿는다.
수학 통계학에 ∞ 기호가 나온다. 숫자 8을 눕히면, ∞이 된다. 무한대로 읽는다. 하나님은 수학기호로 ‘∞’와 같고, 우리는 120, 140 정도다. IQ가 아무리 월등해도, 200을 넘지 못한다. 하나님과 비교하면, 모두 “바보” 수준이다. ∞앞에는 1과 100과 200이 모두 무의미하다. 가령, 1/∞와 100/∞는 값이 같다. 모두 ‘0’이다. 무한대 앞에서 사람들의 지혜는 ‘어리석음’이다. 먼저, 이것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사람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지혜롭다. 아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사람의 것이요, 사람들이 만든 제도도 사람의 것이요,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도 사람의 것이다. 법률도 사람이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은 ‘율법’이 있지만,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맞게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종교법’이다. 율법에서 “죄”가 나온다. 그 죄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다. 죄(罪)는 무엇인가?
지하철을 탔다. 어떤 거지가 지나갔다. 찬송가를 틀고서 슬프게 걸어갔다. 천원짜리 3장을 꺼내서 넣었다. 나는 의로운가? 의롭다면, 왜 의로운가? 누가 의롭다고 한 것인가? 그 선한 행실이 우연히 핸드폰에 촬영됐고, 유튜브에 올려졌다. 매주에 1회씩 그렇게 한 것으로 집계됐다. 연말에 KBS에서 봉사대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의인(義人)인가? 의인이 되었으니, 나는 죄가 없는가? 의는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친구관계와 가족관계도 멀리하고, 혼자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점검해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창조주가 ‘나’의 부모요, 만든 분이요, 작가다. 창조주가 볼 때, 나는 ‘불량품’인가? ‘완성품’인가? 그것을 물어야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인간은 불량품이다”고 선언했다. 창세기 3장 사건이다. 본래,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뱀의 말이 끼어들면서 바이러스에 걸렸고, 인간은 그후 ‘죄’가 계속 복제되었다. 그 죄(罪)는 제거되지 않고, 온 세상에 퍼졌다. 구원은 “죄”(罪)에 대해 필요함이다. 여기서 죄(罪)는 하나님이 보실 때, “죄”다.
산책을 갔더니, 강아지가 앞으로 “쭉” 달려간다. 개주인은 줄을 “쭉” 늘여준다. 개는 ‘끈’ 안에서 자유하고, 주인은 그 개를 다스린다. 주인이 발을 “콱” 때리자, 강아지는 얼른 앉았다. 강아지는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옆에 가서 발로 “콱” 하니, 그 강아지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컹”한다. 강아지는 주인의 말을 잘 듣는다. 그래서 애완견은 집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다. 이럴 경우, 개와 주인은 서로 ‘친밀감’이 생긴다. 누구든지, 말을 알아듣고, 잘 따라야만, 친하다.
하나님과 사람이 틀어진 것이 ‘죄’다. 틀어진 그 상태를 일컬어 ‘죄악’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을 하면서 그때부터 “죄”가 개입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창조를 했고, 사람도 창조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동역자 뱀과 협력해서, 하나님을 대항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죽었다”라고 한다. “범죄한 영혼은 죽었다”는 성경말씀이 있는데, 범죄함으로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고, 그로 인해서 그 육신도 ‘마귀의 권세’ 아래 갇힌다. 죄는 이렇게 무섭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뱀의 말이 더 지혜롭게 보이니, 하나님과 점점점 멀어진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면서, “아담아! 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과 단절된,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죄악의 상태에 놓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수 없다. 예수님은 “백성의 죄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각각 인생들은 각각 죄속에 갇혔고, 마음의 늪에 빠진 그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직접 나타나셨다. 구원투수가 “만루”에 나타나듯, 우리의 죄악된 심령상태에 주님은 나타나서, “구원의 십자가”를 던지셨다. 주님이 던지면, 반드시 승리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구원투수”로 오셨는가? 혹시, 우리가 여전히 투수로 활약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이 구원투수가 되어야한다. 그러면, 졌어도 이긴다. 인간의 죄에서 구원할 ‘마지막 구원투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